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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아펜젤러 초상Wikimedia Commons

헨리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 1858–1902 · 미국

북감리회교육 · 전도한양 · 정동
오늘 무덤의 빗장을 부수신 그분께서, 이 한국 백성에게 빛과 자유를 가져다주시기를.
1885년 부활절 제물포 도착일의 기도 · W. E.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1912)

언더우드와 같은 배로 입국한 북감리회 선교사. 1885년 배재학당을 세워 “욕위대자 당위인역(크게 되려는 자는 남을 섬기라)”을 교훈으로 삼았고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1902년 성경 번역 회의로 가던 길에 해상 사고로 순직했다.

이야기

헨리 아펜젤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자랐다. 본래 다른 교파에서 신앙을 시작했으나, 청년 시절 깊은 회심을 겪고 감리교회로 옮겨 선교사의 길을 결심했다. 학생 자원운동의 물결이 한창이던 때, 젊은 그의 마음에도 '가야 한다'는 부름이 자리 잡았다.

그는 새 가정을 막 이룬 신혼이었다. 아내와 함께,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 조선으로 떠났다. 1885년 부활절, 언더우드와 같은 배로 제물포에 닿았다. 그러나 정세가 불안해 일행은 한 번 일본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들어와야 했다. 들어가는 길조차 순탄하지 않았다.

서울에 자리 잡은 그는 학교를 열었다. 배재학당이었다. 그는 '크게 되려는 자는 마땅히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을 교훈으로 삼았다. 가르치는 일이 곧 섬기는 일이라 믿은 것이다. 정동제일교회를 세웠고, 독립신문과 서재필 같은 이들과도 교류하며 조선의 개화에 마음을 보탰다.

그는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도 함께했다. 여러 선교사가 머리를 맞대던 번역 사업은 더디고 고된 일이었다. 1902년, 그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회의에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해 가라앉았다. 전해지는 바로, 그는 자신과 함께 가던 조선인 동행을 구하려다 함께 물에 잠겼다고 한다. 마흔넷이었다. 번역 회의로 가던 길에서, 그렇게 그의 생이 끝났다.

그가 세운 배재학당은 한국 근대 교육의 한 뿌리가 되었고, 그가 옮기던 성경은 다른 이들의 손에서 완성되었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일의 끝을 보지 못했다. 다만 가던 길 위에서 멈추었을 뿐이고, 그 길은 뒤에 오는 이들이 이어 걸었다.

걸어온 사역
  • 1885년 제물포 입국, 배재학당 설립 — 교훈 ‘욕위대자 당위인역(크게 되려는 자는 남을 섬기라)’
  • 1887년 정동제일교회 설립 — 한국 초기 감리교회의 중심
  • 독립신문·서재필 등과 교류하며 근대 계몽운동을 지원
  • 성서번역 사업에 참여, 1902년 번역자 회의로 가던 중 해상사고로 순직
남긴 열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주시경 등 근대 한국을 이끈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섬김의 지도자’라는 교훈은 한국 기독교 교육의 정신이 되었다. 자녀 앨리스·헨리도 대를 이어 한국에서 헌신했다.

입국
1885.4.5 (제물포)
소속
미국 북감리회
사역
교육 · 전도
대표 업적
배재학당 · 정동제일교회
심화 연구 · 학생 탐구부활주일에 닿은 배 — 헨리 아펜젤러와 정동의 첫 아침이야기 읽기 →

관련 영상

죽기까지 선교하고 순교한 선교사, 아펜젤러 이야기 · 걸어서 성지속으로

참고 출처

외부 링크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CC/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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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aries from Aunae (Dreamy School). 「헨리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1858–1902)」. https://missionaries-khaki.vercel.app/people/appenzeller (열람: 2026. 7. 4.)

잠시, 묻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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