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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 · 가상 인터뷰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장예진 심층 연구

심화 이야기
시나리오 장예진 · 드리미학교 7기영상제작 이하윤 · 드리미학교 7기

학생이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1.당신은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고, 조선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어디를 고향이라 부르시겠어요?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이상하게도 광주의 좁은 골목이 먼저 떠오릅니다. 비스바덴은 제가 태어난 곳이고 미국은 저를 간호사로 만든 곳이지만, 저를 ‘어머니’라 불러 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제 고향이 아닐까요.
Q2.세 살에 어머니와 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결핍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었나요?
오래 미워하기도 했고 오래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마음을 제가 알기에, 사랑받지 못한 아이를 길에서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상처가 저를 그 아이들 곁으로 데려간 셈입니다.
Q3.왜 하필 조선이었나요? 더 편한 선교지도 있었을 텐데요.
편한 곳을 찾았다면 저는 처음부터 배를 타지 않았을 겁니다. 조선에는 여성을 돌볼 여성 의료인이 부족했고, 아무도 만지려 하지 않는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가장 적게 가려는 자리, 저는 그 자리가 제 자리라고 느꼈습니다.
Q4.‘서서평’이라는 이름은 어떤 마음으로 받으셨습니까?
저는 조선의 밥을 먹고 조선의 옷을 입기로 했습니다. 이름도 조선의 이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천천히, 그리고 평평하게 ― 높은 데 서지 않고 낮은 데서 고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이름에 담아 준 것으로 압니다.
Q5.간호를 그저 손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으로, 배움으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왜였나요?
돌보는 일은 천한 일이 아니라 거룩한 일입니다. 조선의 여성들이 그 일을 자부심을 가지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재를 우리말로 쓰고, 배움의 자리를 만들고, 협회를 세웠습니다. 저 하나가 하는 간호보다, 수백 명이 이어 갈 간호가 훨씬 크니까요.
Q6.나환자들 곁에 사는 일이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병이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들이 병보다 사람들의 눈빛에 더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손을 잡아 주는 일에는 큰 힘이 들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했습니다.
Q7.혼인하지 않은 몸으로 열넷의 아이를 기르셨습니다. 힘들지 않으셨나요?
밥이 늘 모자랐고 잠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아이 하나가 제 이름을 처음 부를 때, 저는 세 살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조금씩 되찾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기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저를 어머니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Q8.당신의 봉급과 옷과 이불까지 다 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남긴 것은 없었습니까?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사람을 보고 나면 제 담요가 통째로 제 것일 수는 없더군요. 절반은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누고 나면 남는 것이 적었지만, 마음은 늘 넉넉했습니다.
Q9.당신의 장례 행렬에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문장이 걸렸다고 전해집니다. 그 말의 뜻을 스스로 풀어 주신다면요?
저는 무엇을 이루려고 조선에 온 것이 아닙니다. 큰 병원을 짓거나 이름을 남기려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눈앞의 한 사람을 섬기고, 그 다음 한 사람을 섬겼을 뿐입니다. 삶이 성공으로 기억되기보다 섬김으로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Q10.지금의 우리에게 한 가지를 남긴다면 무엇을 남기시겠어요?
거창한 것을 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곁의 가장 낮은 한 사람을 오늘 섬기십시오. 그 작은 섬김이 매일 쌓이면,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생애가 됩니다. 저는 그렇게 살았고, 후회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