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연구 · 학생 탐구
반 장의 담요 ― 조선의 작은 예수, 서서평
독일에서 버려진 아이는 조선의 어머니가 되었다. 광주의 간호사 엘리자베스 셰핑이 남긴 것은 반으로 찢긴 담요 한 장과 동전 몇 닢이었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장예진 심층 연구
AI 일러스트
서서평
Elisabeth J. Shepping가장 낮은 자리에서 조선을 간호한, 조선의 작은 예수.
- 본명
- Elisabeth Johanna Shepping (한국명 서서평·徐舒平)
- 생몰
- 1880–1934
- 입국
- 1912년, 남장로회 간호선교사
- 거점
- 광주 (군산·서울 제중원 등 경유)
- 사역
- 간호·여성 교육·나환자와 빈민 구제
- 잠든 곳
-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으로 전해진다)
👨👩👧 혈육 없이 조선의 아이 열넷을 거두어 길렀다고 전해진다. 나환자의 아들 하나와 열세 명의 수양딸이었다.
인물 상세 페이지 →독일 비스바덴의 어느 집에, 세 살에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있었다. 잃었다기보다, 어머니가 아이를 두고 바다를 건너간 것이었다. 아이는 할머니의 손에 자랐고, 아홉 살에 그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을 손에 쥔 채 홀로 대서양을 건넜다고 전해진다.
그 아이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훗날 조선의 사람들은 그를 서서평이라 불렀고, 더 낮은 목소리로는 ‘조선의 어머니’, ‘조선의 작은 예수’라 불렀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사랑을 가장 많이 나누어 준 사람이 된 이야기다.
버려진 아이, 쪽지 한 장의 항해
AI 일러스트1880년 9월, 독일 비스바덴에서 그가 태어났다. 아버지의 자리는 이야기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어머니 안나는 어린 딸을 친정 어머니에게 맡긴 채 미국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아이에게 가족이란, 처음부터 곁에 없음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품은 따뜻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아홉 살에 할머니를 여의고, 소녀는 어머니가 있다는 미국을 향해 홀로 배에 올랐다. 재회한 어머니와의 관계는 끝내 서먹했다고 전해진다. 사랑을 갈구했으나 채워지지 않은 유년의 결핍은, 훗날 그가 조선의 버려진 이들을 알아보는 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톨릭 미션 학교에서 간호사로
미국에 정착한 소녀는 가톨릭 계열의 미션 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 낯선 언어와 낯선 신앙 속에서 자란 그는, 성 마르코(성 마리아) 계열 병원의 간호학교를 졸업하며 정식 간호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손으로 사람을 돌보는 일, 그것이 그가 가장 먼저 익힌 언어였다.
간호사가 된 뒤 그의 신앙은 개신교로 옮겨 갔다. 유대인 이민자들을 돌보던 시기를 거치며 복음에 대한 갈망이 깊어졌고, 마침내 해외 선교를 향한 부르심으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버림받은 경험을 지닌 사람이, 버림받은 이들에게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912년, 조선으로 가는 배
AI 일러스트1912년, 서른두 살의 셰핑은 미국 남장로회의 간호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가 배정된 곳은 서울의 세브란스와 군산, 그리고 마침내 광주였다. 남장로회의 선교 구역이던 전라도, 그 가운데서도 광주가 그의 평생의 자리가 되었다.
그는 곧 한국어를 익히고 한복을 입었다. 서양 선교사의 편의를 내려놓고 조선 사람의 밥상과 조선 사람의 방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서서평’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다 ― 천천히·평평하게, 낮은 곳에서 고르게 살겠다는 뜻으로 읽는 이들이 있다.
광주 제중원의 간호부장
광주 제중원(오늘의 광주기독병원)에서 그는 간호부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간호는 병실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환자를 따라 병실 밖으로, 골목으로, 다리 밑으로 갔다. 치료가 끝난 몸이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약값이 없었고, 여성 환자들에게는 몸을 맡길 만한 여성 의료인이 드물었다. 그는 그 틈을 자기 몸으로 메웠다. 밤이면 등불을 들고 환자의 집을 찾았고, 자신의 봉급과 옷과 이불을 하나씩 덜어 냈다고 전해진다.
간호를 하나의 직업으로 세우다
AI 일러스트그의 공헌 가운데 오래 남은 것은, 간호를 조선 여성이 자부심을 가지고 설 수 있는 전문 직업으로 세운 일이다. 그는 간호 교재를 우리말로 짓고, 조선인 간호 인력을 길러 냈다. 돌봄이 천한 일이 아니라 거룩한 일임을 그는 몸으로 가르쳤다.
1923년 무렵 그는 조선간호부회(오늘의 대한간호협회)를 창립하고 오랫동안 회장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의 간호사들이 국제 간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국제간호협의회 가입을 위해 힘썼다. 낮은 자리의 돌봄을 세계와 잇는 다리를 놓은 셈이다.
이일학교 ― 배우지 못한 여인들의 교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한 여인들, 갈 곳 없는 처녀들과 과부들을 모았다. 그렇게 세운 것이 이일학교(李一學校)로, 오늘의 한일장신대학교의 뿌리로 전해진다. 성경과 한글, 위생과 살림을 함께 가르치는 학교였다.
그에게 교육은 자선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살던 여인이 자기 이름을 쓸 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한 복음의 한 장면이었다. 부인조력회(오늘의 여전도회 계통으로 전해진다)를 조직해 조선 여성 스스로가 서로를 돕게 한 것도 같은 마음에서였다.
아무도 만지지 않던 사람들 곁에서
AI 일러스트그가 가장 오래 머문 자리는 나환자들 곁이었다. 당시 나병(한센병) 환자는 병 자체보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멸시에 더 깊이 앓았다. 가족에게서, 마을에서, 길에서 내쫓겼다. 서서평은 그 내쫓긴 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손을 잡았다.
광주의 목사 최흥종과 함께 그는 나환자와 빈민을 위한 일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 초,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이 소록도의 수용 시설 확충을 요구하며 서울을 향해 행진했을 때, 그 배경에는 광주에서 이들과 함께 살아 온 이들의 오랜 헌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열넷을 거둔 어머니
혼인하지 않고 혈육이 없던 그는, 조선의 아이 열넷을 자기 자식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열세 명의 수양딸과, 나환자의 아들 하나였다. 세 살에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던 그가, 버림받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글을 가르치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한 채 자랐으나, 그는 사랑을 만들어 내는 법을 스스로 익혀 냈다. 사람들이 그를 ‘조선의 어머니’라 부른 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었다.
조선 사람처럼 먹고, 조선 사람처럼 앓다
그는 선교사에게 허락된 넉넉함을 거의 누리지 않았다.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병든 이와 굶주린 이에게 내주고, 자신은 조선의 가난한 밥상을 나눠 먹었다. 봉급은 늘 남의 약값과 아이들의 학비로 흩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오래 자신을 덜어 내는 삶은 몸을 상하게 했다. 만성적인 풍토병과 과로, 그리고 영양실조가 겹쳤다. 그는 남을 살리는 일로 자신을 다 써 버린 사람이었다.
반 장의 담요, 동전 몇 닢
AI 일러스트1934년 6월, 서서평은 광주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쉰넷. 그의 방에 남은 것은 반으로 찢긴 담요 한 장과 동전 몇 닢, 그리고 강냉이 가루 두 됫박 남짓이었다고 전해진다. 담요가 반뿐이었던 것은, 나머지 반을 다리 밑의 걸인에게 이미 덮어 주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의학 연구에 쓰도록 내주었다. 마지막까지 자기 몸을 남을 위해 쓴 것이다. 가진 것 없이 살다 간 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조선이 본 가장 부요한 죽음 가운데 하나였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
그의 장례에는 광주의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섰다. 나환자와 걸인, 그가 거둔 아이들과 그가 가르친 여인들이 ‘어머니’를 부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광주가 처음 치른 시민 사회장이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장례 행렬에는 한 문장이 내걸렸다고 전해진다 ―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 그 문장은 그의 신조이자, 22년 광주살이의 요약이었다. 그는 큰일을 이루려 하지 않았고, 다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다 갔다.
낮은 자리에 남은 이름
오늘 광주 양림동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가 세운 학교와 협회는 이름을 바꾸어 살아 있다. 그의 이야기는 뒤늦게 책과 영화로 다시 불려 나왔다. 세상이 잊었던 낮은 자리의 삶을, 세상이 다시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버려진 아이가 어머니가 되고, 이방인이 조선 사람이 되고, 간호사가 성자로 불리기까지 ― 서서평의 생애는 큰 사건들의 연대기가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섬김이 쌓여 만든 한 편의 긴 기도였다. ‘조선의 작은 예수’라는 이름은, 그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 붙여 준 것이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장예진) — 주 연구 대상은 메리 스크랜튼이며 서서평 관련 내용은 원문에 없어, 통설 사료로 보완함
- 서서평 — 위키백과
- 서서평(Elisabeth Johanna Shepping) 선교사 관련 언론·평전 기사 (평양대부흥·아이굿뉴스 등)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서서평 항목
- 최흥종 — 위키백과 (광주 나환자 사역·행진 관련)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