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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연구 · 학생 탐구

공주의 어머니, 사애리시 — 남편을 묻은 땅에 학교를 세우다

결혼 삼 년 만에 남편을 잃고도 조선을 떠나지 않은 여인. 그는 공주의 언덕에 여학교를 세웠고, 그 학교가 훗날 유관순을 길러냈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황샤론 심층 연구

20세기 초 공주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영명학교 교사와 그 앞을 걷는 서양 여선교사의 뒷모습AI 일러스트
공주의 언덕에 선 사애리시. 남편을 묻은 땅이 곧 그가 평생을 바친 자리가 되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사애리시

Alice Hammond Sharp

남편을 잃은 자리에서 학교를 일으킨 공주의 여선교사.

본명
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
생몰
1871–1972
입국
1900년 미국 북감리회 파송 (조선 도착 후 1903년 로버트 샤프와 결혼)
거점
공주 — 이후 천안·논산 등 충청 일원
사역
영명여학교 설립, 여성·유아 교육, 순회 전도, 유관순 발굴·후원
잠든 곳
미국 (1972년 별세, 향년 101세로 전해진다)

👨‍👩‍👧 남편 로버트 아서 샤프(Robert A. Sharp) 목사와 1903년 결혼. 1906년 남편이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뒤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사역을 이어갔다. 학생 원자료의 인터뷰에는 남편 이름을 ‘윌리엄 제임스 홀’로 적은 대목이 있으나, 이는 로제타 홀의 남편과 혼동한 것으로, 사애리시의 남편은 로버트 샤프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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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다. 재혼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신앙 안에서 컸고, 언젠가 바다 건너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리라는 마음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스무 해 남짓 흐른 뒤 그는 뉴욕 브루클린의 선교사 훈련원에서 삼 년을 보냈고, 마침내 지도에서조차 쉬이 찾기 어려운 ‘조선’이라는 나라로 파송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었다. 공주의 나지막한 언덕, 여자아이들이 앉을 작은 교실, 그리고 남편을 묻은 땅을 끝내 떠나지 않은 한 사람의 걸음이었다. 그 걸음의 끝에서 한 소녀가 자라났으니, 훗날 우리가 유관순이라 부르는 이름이다.

지도에도 낯선 나라로

20세기 초 미국 동부 항구에서 증기선에 오르는 서양 여성의 작은 뒷모습AI 일러스트
1900년, 브루클린의 훈련을 마치고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사애리시는 1897년부터 1900년까지 뉴욕 브루클린의 선교사 훈련원에서 준비의 시간을 보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은 그 삼 년 동안 더 단단해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성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1900년 조선으로 건너왔다.

훗날 그는 자신이 왜 하필 조선이었는지, 조선 안에서도 왜 충청도였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이 낯선 땅이 우연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먼 나라로 가는 결단은 대개 한 번의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훈련원의 긴 밤들, 파송을 기다리던 계절들, 그리고 배 위에서 흔들리던 여러 날의 침묵이 쌓여 만들어진 결심이었을 것이다.

첫 사역은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조선에 도착한 그가 처음 맡은 일은 대구 달성 지역의 교회에서 여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 기대할 법한 크고 번듯한 사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작은 일이 하나님 나라의 전진을 돕는 특권이라 여기며 감사했다고 전해진다.

작은 일 앞에서 사람은 쉽게 실망한다. 멀리 왔을수록 더 그렇다. 사애리시가 남긴 자취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큰 무대를 기다리기보다 눈앞의 작은 교실을 성실히 감당했다는 점이다. 그 태도가 이후 그의 모든 사역의 결을 결정했다.

서울에서 만난 사람, 로버트 샤프

20세기 초 충청도 공주의 기와집과 초가가 어우러진 마을 풍경, 멀리 언덕 위 서양식 건물AI 일러스트
1905년, 부부가 함께 내려온 공주. 이곳이 두 사람의 터가 되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사애리시는 로버트 샤프 목사와 미국에서 곧바로 혼인하지 않았다. 각자 조선으로 건너온 뒤, 서울에서 다시 만나 1903년에 결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은 부부이자 같은 소명을 나눈 동역자였다.

1905년, 부부는 공주로 내려가 함께 선교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낯선 내륙의 도시에서 그들은 학교와 교회를 함께 계획했다. 훗날 사애리시는 남편을 두고,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함께 꿈을 나눈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다고 회고했다고 전해진다.

삼 년 만의 사별

이른 봄 공주 외곽의 소박한 무덤가에 홀로 선 여인의 뒷모습, 흐린 하늘AI 일러스트
남편을 묻고도 그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그러나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결혼한 지 세 해가 채 안 된 1906년, 로버트 샤프는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순회 전도 중 감염되었다고 전해진다. 타국에서 서로가 유일한 버팀목이던 부부에게 그 상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훗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삶의 한 부분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갈지, 조선에 남을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이 그를 오래 붙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말씀을 붙들며 절망 속에서 희망의 자리를 찾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슬픔을 지운 것이 아니라, 슬픔을 품은 채 한 걸음씩 다시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떠나지 않기로 한 결심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낯선 조선 땅에 홀로 남는 일은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서 만난 여성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쉽게 떠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많은 여성은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 많았다. 그는 그들을 섬기러 이곳에 왔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여겼다. 선교란 복음을 전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삶을 함께하는 것이라 믿었기에, 이미 정든 이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일은 그에게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남편이 사랑했던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남편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새로운 위로가 아니라, 남편이 못다 한 일을 이어 가겠다는 결심이었다.

공주 영명학교, 여자아이들을 위한 교실

20세기 초 조선의 소박한 교실에서 한복 차림 여자아이들이 책상 앞에 앉아 있고 뒤에서 지켜보는 여선교사의 뒷모습AI 일러스트
여자아이들을 위한 교실. 부모를 설득해 얻어낸 자리였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사애리시는 공주에서 여학생을 위한 배움의 자리를 일구었다. 이것이 훗날 영명학교로 이어지는 여성 교육의 시작이었다. 그는 작은 공간에서 수업을 시작해 점차 학교와 유치원으로 넓혀 갔고, 글 읽기와 쓰기, 성경,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가르쳤다.

그는 여자아이를 학교에 보내기를 꺼리던 부모들을 일일이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분명한데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에서 밀려나는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학생에게는 학비를 받지 않거나 옷과 음식을 내주며 실제 생활까지 도왔다.

그는 교육이 단지 글을 읽고 쓰는 기술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각과 삶을 바꾸고 나아가 가정과 사회까지 변화시키는 힘이라 믿었다. 특히 한 여성이 배우면 그 영향이 자녀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고 여겨 여성 교육에 남다른 마음을 쏟았다.

충청의 산길을 걷다

그의 사역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마을과 시골, 산간 지역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이동 수단이 변변치 않던 시절, 도보와 배를 이용해 여러 지역을 오가는 순회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침구가 다 젖어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그렇게 주저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다시 선교지로 나아갔다고 전해진다. 어느 마을에서는 한 여인이 “이 추운 날씨에 나같이 가난하고 무지한 여자들을 가르치려고 온갖 곳을 다니는 부인을 생각하면 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그는 그런 눈물 앞에서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고 했다.

충청 지방에서 그가 한국어로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컸다고 한다. 오랫동안 앓던 여인을 위해 기도하자 병이 나아 마을 사람의 절반이 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확인하기 어려운 대목이나, 그의 사역이 사람들의 삶 한복판으로 파고들었음을 보여주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함께 걸은 전도부인들

사애리시는 자신이 혼자 사역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공주에서 함께 일한 전도부인들을 오래 기억했다. 처음에는 그들을 돕는 이들 정도로 여겼으나, 함께할수록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이 배웠다고 회고했다고 전해진다.

한 전도부인은 짧은 기간을 함께했음에도 자신의 형편보다 늘 다른 이를 먼저 헤아렸다. 조세피아라 불린 전도부인은 넓은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순회 중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심한 매질까지 당했으나, 상처가 아문 뒤에도 전도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전도부인은 오전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교인들의 집을 돌보았으며, 사애리시가 공주를 떠날 때 그의 사역 일부를 이어받았다.

그는 이들을 보며 선교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동역자들과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임을 깊이 깨달았다고 했다. 낯선 이방의 여선교사와 조선의 전도부인들이 나란히 걸었던 길이, 곧 이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들이다.

보지 못한 곳에서 일하시는 손길

훗날 한 청년이 그를 찾아와 “부인, 저를 아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으나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청년은 자신을 몇 해 전 그가 돌보았던 공주 박 씨의 조카라 밝혔다.

그 무렵 청년은 교인이 아니었고 스스로도 바르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삼촌이 크게 다쳤을 때, 사애리시와 목사가 아무 대가 없이 진심으로 돌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고 이런 행동을 하게 한다면 나도 교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노라 고백했다.

정작 그는 그때 청년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겼을 뿐이었다. 그 작은 섬김이 오랜 시간 한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그는, 선교란 말을 전하는 일만이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보여 주는 일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고 전해진다.

노루목 사경회, 무릎 꿇은 아기

20세기 초 조선의 시골 예배 처소에서 한복 입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어머니 곁의 작은 아기AI 일러스트
노루목 사경회. 어머니 곁에서 아기가 무릎을 꿇었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그가 전한 이야기 가운데 노루목 사경회의 한 장면이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기가 어머니 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 애썼다는 것이다.

그 아기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말은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였다. 아기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그 어린것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사애리시는 전했다.

사경회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배교자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몇 주째 주일예배에 나오다가 자신의 인생이 이미 절반이나 낭비되었다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다짐했고, 끝내 사경회의 대표가 되어 신학교로 가기로 결심했다. 계모에게 교회 출석을 금지당했던 소녀가 마침내 허락을 받아냈고, 그 계모마저 믿기로 마음을 바꾼 일도 있었다.

한 소녀를 알아보다 — 유관순

20세기 초 조선 시골 교회 마당에서 한복 입은 소녀와 서양 여선교사가 나란히 선 뒷모습AI 일러스트
천안 지령리 심방길에서 한 소녀를 알아보다.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사애리시가 유관순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천안 지령리 교회, 오늘날의 매봉교회 심방 자리에 동행하면서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 소녀의 가정과 됨됨이를 눈여겨보았고, 크게 쓰일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유관순에게 학교를 소개하고 더 큰 배움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었다. 시골의 한 여자아이가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것이다. 훗날 유관순이 품게 될 정신의 씨앗에, 이 만남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눈이 한 사람을 알아본 일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을 위한 교실을 고집스레 지켜온 여선교사가 없었다면, 그 소녀가 앉을 자리 또한 없었을 것이다.

천안과 논산으로 넓어진 걸음

공주에 뿌리를 둔 그의 사역은 점차 천안과 논산 등 충청 일원으로 넓어졌다. 그는 여러 곳에 교회와 학교, 영아·육아를 돌보는 시설을 세워 갔다고 전해진다. 논산 읍내에는 여학교와 또 다른 학교를 세웠고, 예배 처소를 마련하며 유치원과 사회복지의 자리를 함께 열었다.

그는 교회를 세울 때에도 건물을 먼저 올리기보다 사람들의 공동체를 먼저 이루고 그 위에서 점차 확장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의료 환경이 부족한 곳에서는 간단한 치료와 간호를 도우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 섬김을 발판 삼아 선교의 바탕을 넓혀 갔다.

교육과 민족의식, 그리고 추방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의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정직과 용기, 공동체 의식을 심었고, 그 안에 민족의식도 함께 자라났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일제의 눈 밖에 났다. 그는 1939년 무렵 한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십 년을 바친 땅에서 떠밀리듯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떠난 뒤에도 그는 이 땅을 위해 기도하며 관심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공주의 언덕과 충청의 산길에 머물러 있었다.

백 년을 산 한 사람의 자취

사애리시는 1972년, 백 년을 넘긴 긴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미국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건너와 남편을 묻고, 그 땅의 여자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운 삶이었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은 큰 성과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고 전해진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지만 먼저 조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살아가려 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다는 믿음으로, 여성과 아이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두었다.

그가 남긴 것은 벽돌과 지붕이 아니라 배움을 얻은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 공주의 언덕에서 시작된 작은 교실이 어떤 사람들을 길러냈는지를 생각하면, 한 사람의 결단이 한 나라에 미치는 무게를 다시 헤아리게 된다.

가상 인터뷰

학생이 사애리시(앨리스 샤프)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 조선 땅에 오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저도 제가 왜 조선에 왔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북감리회 해외여성선교부에서 조선으로 파송을 받았을 때, 저는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뚜렷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제가 조선에 온 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 땅에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믿게 된 것이지요.
Q. 낯선 땅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 언어의 벽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조선에 온 뒤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지만, 한국어와 영어는 어순과 문장 구조가 완전히 달라 대화하고 전도하는 데 어려움이 컸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아픈 이의 증상을 정확히 알아들어야 할 때 답답한 순간이 많았지요. 실수도 잦았지만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돕고 싶어 포기하지 않았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한국어로 전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습니다.
Q. 첫 사역이 여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조선에 와서 처음 맡은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면 더 크고 번듯한 일을 바랐을지도 모르지요. 저 역시 그런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저는 그 작은 일조차 하나님 나라의 전진을 돕는 특권이라 여기며 감사했습니다. 큰 무대를 기다리기보다 눈앞의 작은 교실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 그것이 제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Q.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 삶의 한 부분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어요. 남편은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선교의 꿈을 나누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습니다. 우리는 조선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춰 버린 듯했지요.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외롭고 슬펐고, 때로는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여쭙기도 했습니다.
Q. 그토록 큰 슬픔 속에서도 조선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론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낯선 땅에 홀로 남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요. 하지만 조선에서 만난 여성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쉽게 떠날 수 없었습니다. 배울 기회조차 없는 이들이 많았고,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했지요. 저는 그들을 섬기러 이곳에 왔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품은 채,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한 걸음씩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Q. 많은 사역 가운데 왜 여성 중심의 교육에 마음을 두셨나요?
조선에서 지내다 보니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여자아이들이 유독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자아이들에 비해 배울 기회가 훨씬 적었고, 재능을 펼쳐 볼 자리조차 얻지 못했지요. 배우고 싶어 하면서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소외되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교육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꾸고 나아가 가정과 사회까지 변화시킨다고 믿었기에, 여성 교육에 특별한 마음이 갔습니다.
Q. 교육이 조선을 변화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셨나요?
저는 교육이 그저 글을 읽고 쓰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은 한 사람의 생각과 삶을, 그리고 그가 속한 가정과 사회까지 바꾸는 힘을 지녔지요. 특히 여성 교육을 귀하게 여긴 까닭은, 한 여성이 변화되면 그 영향이 가정 전체로 이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배우고 성장하면 자녀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저는 교육과 복음이 서로 나뉠 수 없다고 여겼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하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Q.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가장 크게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한 청년이 저를 찾아와 자신을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기억하지 못했는데, 그는 몇 해 전 제가 돌보았던 공주 박 씨의 조카라고 했어요. 그 무렵 그는 교인이 아니었고 바르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데, 삼촌이 크게 다쳤을 때 제가 아무 대가 없이 돌보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교인이 되고 싶어졌다고요. 저는 그가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저 도움이 필요한 이를 섬겼을 뿐인데, 그 작은 섬김이 오래도록 한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었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그때 깊이 느꼈습니다.
Q. 유관순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시나요?
천안 지령리 교회 심방 자리에 동행하면서 그 아이를 처음 보았습니다. 가정과 됨됨이를 눈여겨보니 크게 쓰일 재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소개하고 더 큰 배움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시골의 한 여자아이가 상급 학교로 진학하는 일이 그때는 흔치 않았지요. 그 아이가 훗날 어떤 사람이 될지는 저도 다 알지 못했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했기에 길을 열어 주고 싶었습니다.
Q. 조선에서 사역하시며 가장 소중히 여긴 가치는 무엇이었나요?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선교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큰 성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먼저 조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지만 진심으로 관계를 맺으려 애썼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여성과 아이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 사랑과 존중이 선교의 시작이라고 여겼습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황샤론) — ‘사애리시 심층 연구’, ‘사애리시 정보’, ‘사애리시 선교사 질문(가상 인터뷰)’
  • 북감리회 해외여성선교부 관련 기록(학생 정리)
  • 공주 영명학교·매봉교회(천안 지령리) 관련 구전 및 학생 정리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