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리회 여선교사로 1900년 입국해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38년간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1905년 공주 최초의 여학교(명선여학당, 훗날 영명여학교)를 세워 '공주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로 불린다. 특히 영명학교에서 유관순을 발굴해 이화학당 편입을 주선한 첫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사애리시는 미감리회가 조선으로 보낸 여선교사였다. 1900년, 서른을 앞둔 나이에 그는 낯선 동양의 항구를 거쳐 서울 땅을 밟았다. 조선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그는 여성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자신의 남은 생을 걸기로 했다. 한 사람의 결심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는 그때까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1903년 같은 선교회의 로버트 샤프(한국명 사부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04년 공주로 부임했다. 충청 내륙의 작은 고을, 변변한 학교 하나 없던 그곳에서 부부는 함께 교육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사애리시는 1905년 가을, 열두 명 남짓한 여학생을 모아 충청도 최초의 여학교 명선여학당을 열었다. 훗날 영명여학교로 이어지는 이 작은 교실이, 공주 여성교육의 첫 문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1906년, 남편 사부수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온 지 몇 해 되지 않은, 서른넷의 이른 죽음이었다. 결혼 3년 만에 사애리시는 홀로 남겨졌다.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그는, 남편이 묻힌 공주를 떠나지 않았다. 슬픔을 안은 채, 그는 다시 학교 문을 열고 아이들 앞에 섰다.
그 후 사애리시가 공주에서 보낸 세월은 무려 38년에 이른다. 그는 단지 글자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이 사람으로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가르쳤다. 영명여학교를 거쳐 간 이들 가운데는 훗날 한국 여성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길러낸 것은 학생 개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여성의 자리였다.
그중 한 사람이 유관순이었다. 사애리시는 영명학교에서 유관순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 이화학당으로 편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 어린 학생이 더 넓은 배움으로 나아가도록 손을 내민 그 작은 주선이, 이후 어떤 역사로 이어졌는지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스승의 자리란 때로 자신이 끝내 보지 못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1940년, 일제는 그를 강제로 조선 밖으로 내보냈다. 마흔 해 가까이 살아온 땅과, 남편이 잠든 공주를 등지는 길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72년, 백 살을 넘긴 나이로 눈을 감았다. 젊은 날 건너온 바다 너머의 작은 고을에서, 한 여인이 평생을 들여 무엇을 심었는지는 지금도 공주의 옛 학교 자리에 조용히 남아 있다.
심화 연구 · 학생 탐구공주의 어머니, 사애리시 — 남편을 묻은 땅에 학교를 세우다이야기 읽기 →연표
- 1900
미감리회 여선교사로 조선 입국(서울)
- 1903
로버트 샤프(사부수)와 결혼, 이듬해 공주 부임
- 1905
공주 최초의 여학교(명선여학당) 설립
-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미국으로 귀환
관계
관련 영상
참고 출처
- 한국 기독교의 역사 I한국기독교역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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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aries from Aunae (Dreamy School). 「사애리시 (Alice Hammond Sharp, 1871–1972)」. https://missionaries-khaki.vercel.app/people/sharp (열람: 2026. 7. 4.)
사애리시의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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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무엇에 내 삶의 값을 치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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