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연구 · 학생 탐구
한 사람의 말을 배우려고, 그는 그 나라를 사랑했다 — 제임스 게일
캐나다 온타리오의 농촌에서 태어난 청년이 조선의 말과 글과 사람에게로 건너간 이야기. 사전과 번역과 한 편의 옛 소설을 통해, 그는 조선을 서양에 소개하고 조선인에게 복음의 언어를 돌려주었다.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임선우 심층 연구
AI 일러스트
제임스 게일
James S. Gale한영자전과 천로역정과 구운몽 — 조선의 말을 세계의 말로, 세계의 말을 조선의 말로 옮긴 번역가.
- 본명
- James Scarth Gale (한국명 기일 奇一)
- 생몰
- 1863–1937
- 입국
- 1888년 12월 12일, 부산항
- 거점
- 소래·부산·원산·서울(연동교회)
- 사역
- 성서·문학 번역, 한영자전 편찬, 연동교회 목회, 한국학 연구
- 잠든 곳
- 영국 바스 랜스다운 공원묘지
👨👩👧 첫 아내 해리엇 깁슨(의료 선교사 헤론의 미망인, 두 딸 애니·제시), 1908년 사별. 이후 에이다와 재혼. 평생의 벗이자 조력자로 한학자 이창직, 사전 편찬을 도운 양기탁이 곁에 있었다.
인물 상세 페이지 →캐나다 온타리오 주 알마(Alma)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 말과 밭을 돌보던 장로교 장로의 아들이 있었다. 스코틀랜드계 아버지와 화란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남매의 다섯째. 신앙의 전통이 짙은 집안에서 자란 그는 청년이 되기도 전에 마음속에 낯선 땅으로 가는 길 하나를 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건너간 곳은 조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라에서, 총이나 배가 아니라 사전과 번역서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한 사람의 말을 처음부터 배우려는 사람은, 결국 그 나라 전체를 사랑하게 된다. 제임스 게일, 조선 이름으로는 기일(奇一)의 이야기다.
온타리오의 농촌, 그리고 대학의 부름
AI 일러스트게일은 1863년 2월 19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알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장을 경영하는 장로교 장로였고, 어머니는 화란계 미국인이었다. 신앙 전통이 강한 두 혈통이 만난 집에서, 그는 어릴 적부터 예배와 성경이 일상인 가정에서 자랐다.
세인트캐서린스의 예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884년 토론토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재학 중에는 대학 평의회의 특별 허가를 받아 몇 달간 파리의 한 프랑스 대학에서 유학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소속되어 선교의 언저리를 경험했다고 전해진다.
삶의 방향이 또렷해진 것은 1887년이었다. 학생선교자원운동의 선구자였던 프린스턴 신학교의 윌더와 포먼이 토론토를 찾아왔고, 그들의 말은 게일의 마음을 깊이 흔들었다. 그는 이 길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훗날 회고한다.
돈은 없었으나 길은 열렸다
선교를 결심했으나 그에게는 정작 떠날 돈이 없었다. 특정 교단의 파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막막했던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토론토 대학의 YMCA였다. 학생들의 자발적 후원 덕분에, 1888년 스물다섯의 게일은 대학을 졸업하고 곧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파송된다.
1888년 10월 토론토를 떠난 그는 약 두 달의 여정 끝에 12월 12일 부산항에 닿았다. 그러나 이 첫 후원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학생 중심의 자발적 단체가 한 사람을 먼 타국에서 오래 뒷받침하기에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 균열은 훗날 그의 사역을 크게 흔들게 된다.
서울의 첫인상 — 미지의 세계
AI 일러스트부산에 내린 그는 언더우드를 만나 한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가 처음 본 서울의 모습은 처참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기록에는 거리에 놓인 주검과 그 냄새에 대한 묘사가 남아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사람을 견디기 어렵게 했다.
그러나 그는 곧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래된 관습과 유교적 세계의 한 자락이라는 것, 그리고 이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 줄 참된 빛이 절실하다는 것을 함께 느꼈다고 한다. 조선의 인구를 약 1200만으로, 그 크기를 미국 유타 주쯤으로 어림했다는 대목에서는, 아직 이 나라를 낯설게 재던 이방인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이 나라를 밖에서 관찰하는 데 그치고 싶지 않았다. 삶과 문화를 더 가까이서 배우려면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외국인이 서울 밖에 나가 사는 일은 시도된 적이 없었기에, 그 결정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였다.
해주에서 소래로 — 이창직을 만나다
조선에 온 지 넉 달쯤 지난 1889년, 그는 황해도 해주를 향해 첫 여행을 떠났다. 해주 사람들은 처음에 낯선 외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그곳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안씨라는 이의 도움으로 거처를 소래(황해도 장연군)로 옮기고 나서야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소래에서 그는 한학자 이창직을 만난다. 이 만남은 게일의 조선살이에서 가장 오래도록 이어진 우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창직은 이후 그의 평생지기이자, 번역과 사전 작업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석 달 남짓 소래에 머무는 동안 그는 우리말을 배우고 조선의 생활 양식을 몸으로 익혔다. 그리고 1889년 여름, 이창직과 함께 배를 타고 제물포를 거쳐 서울로 돌아와, 사전 편찬의 언저리 작업을 돕기 시작한다.
후원이 끊기다, 그리고 북장로회로
부산에서 열 달가량 사역하다 서울로 다시 올라온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닿는다. 그를 파송했던 토론토 대학 YMCA가 재정난으로 더는 선교비를 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선의로 시작된 후원의 구조적 한계가 끝내 드러난 셈이다.
지원이 끊긴다는 것은 사역 자체가 멈춘다는 뜻이었다. 그는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활동에 큰 제약을 겪었다. 이 시기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했는지는 그의 편지 곳곳에 배어 있다고 전해진다.
길은 조선에서 사귄 벗들을 통해 열렸다. 의료 선교사 헤론과 마펫의 도움으로, 그는 1891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소속으로 옮겨 가게 된다. 이로써 그의 조선 사역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봄날과 겨울 — 해리엇, 그리고 원산
후원이 끊긴 사건으로부터 한 해 뒤, 게일에게 봄날이 찾아온다. 의료 선교사 헤론과 사별한 해리엇 깁슨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해리엇에게는 애니와 제시라는 두 딸이 있었고, 게일은 그렇게 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같은 해 가족과 함께 옮겨 간 원산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정세는 어수선했고, 병마가 뒤따랐다. 게일은 말라리아에 걸렸고, 아내 해리엇은 결핵이라는 지병을 얻어 오래 고생했다. 세월이 흘러 1908년, 해리엇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훗날 게일은 아내와 사별한 지 두 해 뒤, 자신보다 열두 살 아래인 에이다와 요코하마에서 다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삶은 그에게 봄과 겨울을 번갈아 건넸으나, 그는 매번 다시 붓을 들었다.
원산의 골방에서 태어난 책들
AI 일러스트원산은 고생만 준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의 골방에서 게일의 가장 큰 업적들이 태어났다. 그는 신·구약 성서의 우리말 작업에 매달렸고, 1895년에는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순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천로역정』은 그가 한국어로 번역한 첫 책이었다. 조선에 온 지 일곱 해 만에 번역서를 내놓았다는 것은, 그가 그 사이 우리말을 얼마나 깊이 익혔는지를 말해 준다. 성경 다음으로 세계인이 애독하던 이 기독교 고전을, 그는 조선인도 반드시 사랑하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1897년, 그는 조선에서 간행된 최초의 『한영자전』을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말을 영어로 풀어낸 이 사전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고, 오늘 우리가 쓰는 한영사전의 뿌리에는 여전히 게일의 작업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양기탁, 그리고 사전을 함께 엮은 손들
사전은 결코 한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한영자전』 편찬에는 양기탁이라는 젊은 조력자가 있었다. 그는 여러 해에 걸쳐 게일과 함께 표제어를 고르고 뜻을 다듬었다.
이 오랜 작업을 거치며 양기탁 자신도 구한말을 대표하는 영어의 달인으로 성장했고, 훗날 통역과 언론의 영역에서 이름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게일은 자신의 사전이 이런 조선인 동역자들의 손을 빌려 완성되었음을 늘 감사히 여겼다.
이창직과 양기탁 — 게일의 책 뒤에는 언제나 이렇게 우리말을 몸으로 아는 조선인들의 이름이 함께 있었다. 그의 번역은 홀로 이룬 성취가 아니라, 두 언어 사이에 놓인 여러 손의 공동 작업이었다.
‘언어’라는 달란트, 그리고 한글 사랑
게일은 왜 하필 번역을 택했을까.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 곧 ‘언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낯선 말을 유난히 빨리 익히는 사람이었고, 한국어 역시 그러했다.
무엇보다 그는 한글을 아꼈다. 그는 이 문자가 세종대왕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고 있었고, 이토록 간명하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가진 나라를 두고 ‘은총을 받은 나라’라 여겼다고 한다. 이런 애정은 단지 도구를 다루는 태도가 아니라, 한 문화를 향한 존경이었다.
그 사랑은 이름에까지 남았다. 그는 서명에 ‘기일(奇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즐겨 썼다. 서양의 James S. Gale이 아니라 조선의 기일로 서명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어디에 속하기를 원했는지를 조용히 드러낸 셈이다.
연동교회의 목사, 그리고 학교를 세우는 사람
AI 일러스트1900년, 게일은 서울 연못골의 연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한다. 이후 그는 한국을 떠나기까지 27년 동안 이 교회를 섬겼다. 처음 부임할 무렵 백 명이 채 되지 않던 교인은, 여덟 해 뒤 팔백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강단에만 머물지 않았다. 연동여학교와 예수교중학교 같은 학교를 세워 젊은 인재를 길렀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설립을 도왔으며, 조선의 청년들이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목회만으로도 벅찬 나날에 교육까지 병행한 까닭을, 그는 자신의 몸을 조선 선교에 온전히 바치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사람을 기르는 일은 결국 하나였다.
조선을 세계에 옮기다 — 『구운몽』과 한국학
AI 일러스트게일은 세계의 책을 조선에 옮겼을 뿐 아니라, 조선의 문학을 세계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옮겨, 1922년 영국에서 『The Cloud Dream of Nine』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심청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도 그의 관심 안에 있었다.
이 방향의 번역은 단순한 소개를 넘어선다. 그것은 조선에도 오래되고 깊은 문학과 사상이 있음을 서양에 증언하는 일이었다. 게일은 조선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고, 배울 것이 있는 문화로 대했다.
그는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의 회장을 지내며(1911–1916으로 전해진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학문의 언어로 정리했다. 성경 개역 작업의 개역자회 회장직도 맡았다. 그가 남긴 국·영문 저서는 마흔 권을 넘고, 조선과 조선 사람에 관한 논문과 기고는 수백 편에 이른다.
사전 이야기 — 통설과 조심스러운 정정
게일의 사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언더우드·헐버트와의 협업이 함께 언급된다. 실제로 초기 사전 편찬의 시기에 여러 선교사가 서로의 작업을 도왔던 것은 사실로 전해진다. 그러나 1897년의 『한영자전』은 게일이 조선인 조력자들과 함께 완성한 그의 대표작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언더우드 역시 이보다 앞서 자신의 사전을 따로 펴냈다. 그러므로 ‘세 사람이 하나의 사전을 함께 썼다’는 서술보다는, 같은 시대에 각자의 사전과 번역을 이루며 서로를 도왔다고 헤아리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한 인물의 업적을 기릴 때에도 사실의 결을 조심스레 살펴야 함을 배운다. 게일의 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사전이 여러 손과 시대의 협력 위에 세워졌음을 아는 것이, 그 일의 무게를 더 정직하게 전한다.
바스로 가는 길 — 마지막 십 년
1927년 5월, 게일은 오래 섬긴 연동교회를 사임하고 조선을 떠나 캐나다로 향한다. 그해 가을에는 아내와 함께 영국 바스로 이주했고, 이듬해 선교 사역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1937년 1월, 그는 일흔넷의 나이로 바스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의 몸은 랜스다운 공원묘지에 묻혔다. 캐나다의 농촌에서 태어난 한 사람은, 조선의 말과 글을 사랑하다 마침내 영국의 조용한 도시에서 눈을 감았다.
남은 것들 — 오늘 우리 곁의 게일
게일이 남긴 것은 오래전에 닫힌 역사가 아니다. 그가 옮긴 『천로역정』은 조선인에게 처음으로 우리말로 된 서양 문학을 안겨 주었고, 그의 사전은 오늘의 한영사전 안에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는 조선을 배우려 왔다가,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 나라의 말을 처음부터 익히려 한 그 겸손한 결심이, 결국 두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된 셈이다.
그러므로 기일(奇一)이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려 본다. 낯선 이 땅과 그 위의 사람, 그들이 만들어 온 역사와 문화를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불렀다. 그 사랑은 지금도 사전의 갈피와 옛 소설의 문장 사이에 살아 있다.
가상 인터뷰
※ 학생이 제임스 게일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 Q.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게일 선교사입니다. 1863년 2월 19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 알마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두고 ‘문학 번역가’라 부르곤 하는데, 『한영자전』이며 『천로역정』 같은 책을 여러 권 펴낸 까닭인 듯합니다.
- Q. 대학 시절부터 선교를 마음에 두셨다고요.
- 그렇습니다. 오래 품고 있던 열정이 또렷한 결심으로 바뀐 것은 1887년이었습니다. 학생선교자원운동의 선구자였던 프린스턴 신학교의 윌더와 포먼이 토론토를 찾아왔지요. 그분들의 말씀이 제 마음을 깊이 흔들었고, 저는 이 길이 제게 주어진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Q. 처음 조선으로 떠날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 솔직히 그때 저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지요. 다행히 토론토 대학 YMCA의 후원, 그러니까 학생들의 십시일반 덕분에, 스물다섯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곧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파송될 수 있었습니다.
- Q.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나 서울에 계시다가, 굳이 황해도 해주로 떠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이유는 단순합니다. 조선의 삶과 문화를 더 가까이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외국인이 나라 곳곳을 여행한 적은 있어도, 서울 밖에 나가 사는 일을 시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었지요. 그런데 그 미지의 세계가 자꾸만 저를 이끌더군요.
- Q. 파송 단체였던 YMCA의 후원이 끊겼을 때는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 지원이 끊긴다는 것은 사역이 멈춘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궁핍에 시달렸고, 활동에도 큰 제약을 받았지요. 참 많이 울부짖던 시절입니다. 그러다 조선에서 사귄 벗, 의사 헤론과 마펫의 도움으로 1891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옮기게 되어 다시 길이 열렸습니다.
- Q. 원산 시절은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큰 업적도 그곳에서 이루셨지요.
- 맞습니다. 원산의 삶은 고단했지만, 바로 그곳에서 신·구약 성서 작업을 하고, 1895년에는 『천로역정』을 우리말로 펴냈습니다. 조선에 온 지 일곱 해 만이었지요. 그리고 두 해 뒤인 1897년에는 조선에서 처음 나온 『한영자전』을 간행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가 아니라, 양기탁 같은 좋은 조력자들의 손이 함께한 일이었습니다.
- Q. 여러 사역 가운데 하필 번역에 마음을 쏟으신 까닭이 있으신지요.
- 제게 주어진 달란트가 ‘언어’였던 것 같습니다. 낯선 말을 비교적 빨리 익히는 편이었지요. 무엇보다 저는 한글을 사랑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만드셨다는 이 글자는 참으로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명에 ‘기일(奇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즐겨 씁니다.
- Q. 『천로역정』을 첫 번역서로 고르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세계인이 애독하는 기독교 고전입니다. 저자의 생전에 이미 여러 판이 나올 만큼요. 이 책을 볼 때마다 번역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습니다. 조선인들도 틀림없이 좋아하리라 확신했거든요. 이 한 권으로 복음과 삶의 자세를 함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 Q. 연동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다른 일도 병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연동교회에서 27년을 섬겼습니다. 다만 강단에만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연동여학교와 예수교중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길렀고,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설립을 돕고, 청년들이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힘을 보탰지요. 제 몸을 조선을 위해 온전히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 Q. 조선의 문학을 서양에 처음 소개하신 일도 있으시지요.
- 네,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옮겨 『The Cloud Dream of Nine』이라는 제목으로 펴냈습니다. 조선에도 이토록 깊고 오래된 이야기가 있음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조선을 그저 도와줄 대상이 아니라, 배울 것이 많은 문화로 만났습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임선우)
- 제임스 게일, 『조선, 그 마지막 십 년의 기록』
- 제임스 게일 선교 편지
- 위키백과 ‘제임스 게일’ · 나무위키 ‘제임스 게일’
- 고신뉴스 · 아이굿뉴스 · 크리스천투데이 · 아시아경제 관련 기사
- 한국교회총연합 인물 기록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