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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아펜젤러 · 가상 인터뷰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정선호 심층 연구

심화 이야기
시나리오 정선호 · 드리미학교 8기영상제작 정선호 · 드리미학교 8기

학생이 헨리 아펜젤러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1.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앞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헨리 아펜젤러라고 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시골에서 자랐고, 감리회의 선교사로 조선에 왔습니다. 1885년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닿았고, 서울 정동에서 배재학당을 열고 정동의 첫 예배당을 세우는 일에 삶을 두었습니다.
Q2.조선으로 오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무디 선생의 부흥운동과 거기서 태어난 학생자원운동이 제 마음을 조선으로 이끌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조선으로 가기로 한 것은 제가 아니라 다른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 자리를 대신 맡게 된 것이지요. 지금 돌아보면 그 우연 같은 자리바꿈조차 저를 이곳으로 보내려는 뜻이었다고 믿습니다.
Q3.부활주일에 도착하셨는데, 곧바로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양 사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서양 여인이 서울에 나타나는 것이 위험하다는 전갈이 와서, 저희 부부는 일주일 만에 일본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해 여름에야 다시 돌아와 정동에 짐을 풀 수 있었습니다.
Q4.배재학당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동료 스크랜튼의 집 한 채를 사서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작은 교실이 전부였습니다. 이겸라와 고영필,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것이 첫 수업이었지요. 그 둘은 서양 의술을 배우려고 영어가 필요했던 것이지, 배움 자체를 구하러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Q5.학생들이 출세를 위해 영어를 배우러 왔다면,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습니까.
저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라는 교훈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통역관이나 학교의 일꾼을 길러 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출세에 매인 시선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Q6.조선인을 서양 사람처럼 만들려 하셨던 것은 아닌지요.
그럴 뜻은 없었습니다. 저는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세워져 스스로 조선 사회를 일으키기를 바랐습니다. 조선에는 조선만의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남의 신학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자주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이 자라나기를 바랐습니다.
Q7.여성에게 세례를 베푼 일을 특별하게 기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벧엘예배당에서 집회를 시작한 다음 주일, 매서인 최성균의 아내 되는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한국의 첫 개신교 여성 세례인이었지요. 저는 그 일을 ‘안방으로 통하는 길을 연 사건’이라 불렀습니다. 좀처럼 바깥과 마주하지 못하던 안방의 문이 한 사람의 세례로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Q8.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같은 부활주일에 함께 조선에 닿은 동행입니다. 교파는 달랐지만 초기의 좁은 땅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저는 감리교의 예배당을, 그는 장로교의 예배당을 세웠지요. 서로 구역을 나눈 것은 훨씬 뒤의 일이고, 처음에는 손을 잡고 함께 걸었습니다.
Q9.성경 번역과 출판에 힘을 쏟으셨는데,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말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신앙이 제 것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조선의 정서에 맞는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기도 하며 함께 연구했지요. 배재에 인쇄소를 둔 것도, 배운 이들이 스스로 세상에 글을 내보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Q10.마지막으로, 조선을 향한 마음을 한마디로 전해 주신다면요.
저는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왔습니다. 당장 큰 나라를 세우는 일은 제 몫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일어서도록 돕는 일이 제게 맡겨진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이 언젠가 이 땅 깊이 뿌리내리기를, 저는 뱃길 위에서도 바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