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연구 · 학생 탐구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라 — 정동에서 언더우드가 심은 뿌리
런던의 발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은자의 나라로 건너간 청년 목사. 새문안교회와 경신, 연희전문에 이르기까지 언더우드가 조선 땅에 남긴 서른한 해의 발자취.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신규담 심층 연구
AI 일러스트
호러스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은자의 나라에 성경과 학교와 병원을 심은 북장로회의 개척자.
- 본명
-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 생몰
- 1859–1916
- 입국
-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제물포
- 거점
- 서울 정동 · 남대문
- 사역
- 새문안교회 · 성경 번역 · 한영사전 · 고아원(경신) · 연희전문
- 잠든 곳
- 별세 후 미국 뉴저지, 훗날 서울 양화진으로 이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발명가이자 제조 화학자, 큰형 존 T. 언더우드는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의 설립자. 부인은 의료 선교사 릴리어스 호턴, 외아들 원한경(H. H. Underwood)도 훗날 한국 선교사가 되었다.
인물 상세 페이지 →영국 런던의 한 발명가 집안에 넷째 아이가 있었다. 십자가와 발톱을 세운 사자가 그려진 가문의 문장 아래에서, 아이는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고, 무엇이든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말하라”는 가훈을 들으며 자랐다. 그 아이가 자라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은자의 나라로 갈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1885년 부활절 아침, 안개 자욱한 제물포에 한 청년 목사가 내렸다. 앞으로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서른한 해 뒤, 그가 심은 씨앗은 교회와 학교와 병원과 사전이 되어 조선 땅 곳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이야기다.
발명가의 집, 믿음의 집
AI 일러스트1859년 7월 19일, 언더우드는 존 언더우드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어 사이의 넷째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발명가이자 제조 화학자로, 당대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였던 마이클 패러데이의 문하에서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에게서 직접 훈장을 받았을 만큼 이름난 과학자였고, 훗날 그의 발명을 토대로 큰아들 존 T.는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세운다.
그러나 이 집안을 더 깊이 물들인 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이었다. 진외증조부 알렉산더 와우는 런던선교회 심사위원장을 지냈고, 삼촌 에드워드 존스는 런던선교회 총무였다. 언더우드 대에 이르면 그 자신뿐 아니라 사촌 여섯이 해외 선교사로 나갔다. 교회에 대한 헌신과 온화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말하자면 그가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이었다.
유복하던 살림은 1865년 어머니와 갓난 여섯째를 잇달아 잃고, 이듬해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가 일으킨 문제로 파산하면서 크게 흔들렸다. 열 살의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가톨릭계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1872년 아버지가 먼저 미국으로 건너간 뒤 1873년 온 가족이 뉴저지로 이민한다.
11킬로미터를 걸어 다닌 대학 시절
언더우드는 열네 살 무렵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아버지는 그를 뉴저지의 명문 해스브룩 소년학교에 보냈고, 졸업 뒤 진로를 고민하던 그를 눈여겨본 담임목회자 메이번이 대학 진학을 권하며 직접 개인교사를 자처했다.
1877년, 열여덟의 언더우드는 뉴욕대학교에 입학한다. 어려운 형편 탓에 학교까지 11킬로미터를 오갔고 끼니도 겨우 이었으나, 하루 다섯 시간만 자며 공부해 탁월한 성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델타 웁실론이라는 학생 사교 모임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모임은 ‘보다 나은 사람을 길러 전 지구 공동체에 이바지한다’는 정신을 내걸고 있었다. 문학토론클럽 부회장, 학생신문 편집인, 웅변상 수상, 졸업식 연설자 — 이 목록은 훗날 조선에서 사전을 짓고 신문을 창간하며 대학을 세운 사람의 밑그림처럼 보인다.
1881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그해 9월 뉴브런즈윅 개혁신학교에 입학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존 언더우드는 그 무렵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인도로 향하던 마음
언더우드가 처음 선교의 꿈을 품은 것은 네 살 때, 인도 선교사의 강연을 들으면서였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흐르며 그 꿈은 소명이 되었고, 그는 인도 선교를 위해 1년간 의학을 공부할 만큼 그 부르심을 확신했다.
신학교 시절 그는 고린도전서 9장 16절 —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 을 좌우명으로 삼아 날마다 거리에 나가 말씀을 전했다. 1883년 여름, 목사 없는 작은 폼프턴 개혁교회를 임시로 맡자 그의 열정에 힘입어 신자가 스물아홉 명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여전히 인도를 향해 있었다. 앨버트 올트만스에게서 ‘은자의 나라 조선’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안타까움은 느꼈으나 마음이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조선은 아직 그의 땅이 아니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마음의 방향을 바꾼 것은 한 통의 편지였다. 일본에 머물며 성경을 탐독하고 한문 성경 번역에 착수한 조선인 이수정이,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조선으로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호소문을 보낸 것이다. 그 글이 실린 주간지를 읽던 언더우드의 마음에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는 물음이 울렸다.
처음 그는 ‘그래도 누군가는 조선으로 가겠지’ 하며 외면하려 했다. 그러나 물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외선교부를 찾아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했으나 기금 부족으로 좌절되었고, 북장로회에 다시 요청했지만 ‘조선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일본 현지의 보고로 보류되었다. 마침 신도 맥윌리엄스가 5천 달러를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기부하면서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언더우드의 신청은 한 번 반려되었다. 낙심한 그가 한 교회의 청빙을 수락하려던 순간, 다시 “조선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라는 마음의 울림을 느끼고 재차 도전했다고 전해진다. 두툼한 지원서와 추천서에 힘입어, 마침내 1884년 7월 28일 북장로회는 언더우드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요코하마의 겨울, 함께 준비한 사람들
임명 뒤 그는 버건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받고, 1884년 11월 뉴브런즈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사이 의료 선교사 알렌이 먼저 조선행을 지원해 최초의 정주 선교사가 되어 있었다.
1885년 1월, 언더우드는 일본에 도착해 조선어를 배우며 입국을 준비했다. 헵번 선교사의 집에 머물며 많은 것을 배웠고, 요코하마에서 조선인들을 소개받아 이수정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의 초기 사역이 헵번의 발자취를 닮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시기의 배움은 깊었다.
이 겨울 요코하마에는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의사 부부, 그리고 메리 스크랜턴이 함께 있었다. 서로 다른 교단에서 왔으나 한마음으로 조선 선교를 준비한 이들 가운데, 언더우드는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선발대로 조선행 배에 올랐다.
부활절 아침, 제물포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언더우드는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학생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 항구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그 안개 뒤로 무엇이 기다릴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고 한다. 소식을 들으려면 일본이나 중국을 거쳐야 했고, 들려오는 소식조차 좋은 것이 드물던 나라였다.
당시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거치며 문을 열었으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세가 어지러웠다.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물포에 함께 내린 세 사람은 서둘러 입경하려 했으나, 어수선한 정세로 미국 공사관은 입경을 반대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언더우드는 입경을 고집해 설득 끝에 서울로 향했다.
제중원의 약제사
AI 일러스트언더우드가 서울에 닿은 지 사흘 만인 1885년 4월 10일, 알렌이 세운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문을 열었다. 왕립병원 제중원에서 언더우드는 짐을 풀자마자 약제사로 일했다. 하루 마흔에서 일흔 명의 환자를 보며 진료실 일을 거들었다.
직접 전도가 금지된 나라에서, 병원은 선교사들에게 합법적으로 발 디딜 수 있는 자리였다. 곧이어 스크랜턴과 헤론이 합류했고, 1886년 3월에는 제중원 안에 의학교가 세워졌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대학 시절 자연과학에 뛰어났고 선교사 훈련으로 의학을 익힌 그의 이력이 비로소 쓰임을 얻은 셈이다.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사들은 병원이라는 안정된 신분을 발판 삼아 조금씩 운신의 폭을 넓혀갔다.
송순용과 함께, 사전을 짓다
언더우드는 약제사와 교사 일을 하는 틈틈이 어학 공부에 매진했다. 송순용이라는 조선인 선생을 두고 배웠는데, 맞춤법 체계가 아직 잡히지 않은 탓에 공부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1년이 채 되기 전에 조선어로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익혔다.
영어로 된 조선어 문법서를 내달라는 요청이 쌓이자 그는 곧 집필에 들어갔고, 문법서는 1889년에 완성·출판되었다. 이 책은 오늘날 국어학자들에게도 주목받는데, 그만큼 그가 언어에 남다른 감각을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 1890년 말에는 한영사전을 펴냈다. 이 작업에는 선교사 게일이 힘을 보탰다.
언더우드는 순 한글로 새 낱말을 만들어보려 애쓴 흔적도 남겼다. 그는 10년 동안 열여덟 권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이 교리서의 번역과 출판이었다. 사람의 손에 들린 성경책 한 권이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한다는 개신교의 오랜 믿음 때문이었다. 덕분에 선교 초기의 기독교는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갈 수 있었다.
성경 번역, 스스로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기다
AI 일러스트언더우드가 오기 전, 만주에서는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이응찬·백홍준·서상륜 등 조선인의 도움을 받아 신약을 번역하고 있었고, 그 결실인 『예수셩교젼셔』가 1887년에 나왔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한글로 옮겨 두었다. 그러나 개척 선교사들의 조선어 실력이 자라면서 먼저 나온 성서의 부족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1887년 2월 7일, 성서번역위원회가 출범한다. 언더우드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회장직을 맡아 번역을 이어갈 만큼, 성경 번역을 자신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다. 1900년 9월에는 신약성서가 완성되어 정동제일교회에서 기념 예배가 열렸고, 학생의 연표에 따르면 구약 번역은 1910년에 이르러 마무리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문서 선교의 토대도 함께 다졌다.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가 마련되고, 1890년에는 교파를 아우르는 조선성교서회가 조직되었다. 언더우드는 그 초대 서기가 되었다.
고아를 품다 — 경신, 그리고 훗날의 연희
직접 전도가 막힌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조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다 고아원을 세웠다. 고아원의 아버지로 불린 조지 뮐러에게 오래 관심을 두어온 것을 보면, 이는 단지 어쩔 수 없이 택한 수단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걱정하는 이들의 만류에도 아이들을 극진히 돌보았다. 이곳에서 훗날의 김규식, 그리고 그의 아들 원한경이 자랐다.
설립 초기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소문을 낳아, 1888년 6월에는 흥분한 군중이 정동으로 몰려드는 이른바 ‘영아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교 초기는 이렇듯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고아원은 1897년 문을 닫았으나, 그곳의 아이들을 무어와 게일 등이 계속 가르쳤고, 1901년 게일이 이들을 중심으로 남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경신학교다. 그리고 경신학교의 대학부로 세워진 것이 바로 연희전문학교였다. 한 고아원에서 시작된 씨앗이 어떻게 대학으로 자라는지를, 언더우드의 생애는 조용히 보여준다.
새문안교회, 조선 최초의 조직 교회
AI 일러스트복음을 전하는 일 — 그것이 언더우드가 조선에 온 궁극의 목적이었다. 종교 전파가 금지된 처지였으나, 말이 통하기 시작하자 그는 꾀를 냈다. 길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을 알고, 사람 많은 곳에 가 큰 소리로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1886년 7월 18일, 언더우드는 헤론의 집에서 아펜젤러의 보좌를 받아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조선에서의 첫 개신교 세례였다. 이어 소래교회 사람들이 은밀히 찾아와 세례를 받는 일이 이어졌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는 자신의 정동 사택에서 세례받은 열네 명의 교인과 함께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이때 두 사람이 장로로 세워져, 두루 갖춘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가 탄생했다. 같은 해 10월, 그는 여행 허가증(호조)을 받고 서울을 벗어나 첫 지방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때까지 서울을 벗어난 선교사는 아무도 없었기에, 모두가 그를 걱정했다.
릴리어스 호턴, 인생의 동반자
언더우드는 사역을 위해 서둘러 결혼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다 1888년 3월, 서울에 온 새 선교사들 가운데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 릴리어스 호턴이 있었다. 그녀는 조선에서 두 번째 여성 의료 선교사였고, 언더우드는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전해진다.
릴리어스는 환자를 진료하는 한편 성경반을 운영했고, 여성 선교사들의 권리와 지위를 높이는 일에 힘썼다. 당대의 표준적인 여성상보다 훨씬 앞서 나간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더우드에게 조선어를 배우며 사랑을 키웠고, 두 사람은 1889년 3월 결혼했다. 명성황후가 결혼 선물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겸한 전도여행을 떠나 곳곳에서 베풀고 돌아왔다. 1890년 9월에는 아들 원한경이 태어났다. 가족이 생기면서 언더우드의 삶은, 학생의 표현대로 ‘넓어지고 부드러워지고 무거워졌다.’
네비어스 정책 — 스스로 서는 교회를 향하여
선교사들이 각자의 역량을 펼치는 가운데 갈등도 없지 않았다. 알렌·언더우드·헤론 사이의 마찰이 그러했는데, 알렌이 외교관의 길로 가고 헤론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언더우드는 노련한 선교사 네비어스 부부를 초청했다. 네비어스는 서울에 2주간 머물며 선교 방법론을 강의했고, 그 과정에서 이른바 삼자원칙 — 스스로 다스리고(自治), 스스로 부양하며(自給), 스스로 전도하는(自傳) — 선교정책이 조선에 도입되었다. 오늘날까지 좋은 평가를 받는 방침이다.
언더우드 자신도 오랜 시련을 겪었으나,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리라는 약속은 변치 않는다는 위로 속에서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전해진다.
격동의 구한말, 조선의 운명과 함께 걷다
AI 일러스트1890년대 중반부터 조선은 거센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개혁,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대한제국 선포가 잇따랐다. 여러 경고 탓에 언더우드가 정치 현장에 직접 뛰어드는 일은 없었으나, 그는 언론과 출판과 청년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근대 사상에 눈뜨도록 도왔다.
1897년 4월, 그는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했다. 신앙과 함께 농사·위생·근대 지식을 전하는 이 신문은 백성의 눈을 여는 창이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조선인을 위한 요양원과 진료소를 세웠는데, 세상을 떠난 작은형을 기려 ‘프레드릭 언더우드 휴양소’라 이름 붙였고, 콜레라가 돌 때는 격리 병원을 맡아 릴리어스와 함께 환자를 돌보았다.
그는 육체를 치유하는 일 또한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믿었다. 1897년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수용소를 시작해, 훗날 그곳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그의 존재의 모든 흐름은 연합을 향했다’
언더우드가 품은 가장 큰 꿈은 교파의 벽을 넘어선 하나의 교회였다. 그는 1903년 서울 YMCA(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에 이사로 참여하고, 1904년 대한교육학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는 등 연합의 자리마다 중심에 섰다.
그가 꿈꾼 연합은 단순한 사업적 협력이 아니라 교파 간의 실질적이고 유기적인 합동이었다. 1905년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가 조직되며 첫발을 내디뎠으나, 하나 된 교회는 갈등 속에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교부공의회는 1912년 연합공의회로 재조직되어 연합사업을 이어갔다.
부인 릴리어스는 남편을 두고 “그의 존재의 모든 흐름은 연합을 향하고 있었다”고 했고, 게일은 그가 “장로·감리라는 교파의 구분을 없애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언더우드의 꿈은 대한장로교회도 대한감리교회도 아닌, ‘대한 그리스도 교회’의 설립이었다.
종합대학의 꿈, 생명과 바꾸다 — 연희전문
AI 일러스트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항일 세력이 대거 검거되고 치외법권마저 사라지면서, 선교사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이때 언더우드는 고등교육을 통해 한국 청년들이 스스로 설 힘을 키우게 하자고 생각하고, 서울에 종합대학을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꿈꾼 것은 신학교 하나가 아니라 온갖 학문을 두루 다루는 종합대학이었다. 평양 선교사들은 평양의 신학교 하나로 충분하다고 보았고, 대학의 위치를 둘러싼 평양과 서울의 대립은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공동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서울을 설립지로 정했다.
개정사립학교규칙이 종교 교육을 금지하며 큰 위기가 닥쳤으나, 언더우드는 경신학교 대학부로서 다섯 개 학과의 허가를 받아 조선기독교대학을 세웠다. 이 학교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17년 연희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식 인가를 받는다. 1886년 고아원에서 시작된 꿈이, 서른 해 만에 대학이 되어 열매 맺은 것이다.
마지막 여행, 그리고 영원한 안식
1913년 말부터 언더우드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1914년, 내한 30주년을 맞아 한국 교인들이 마련한 예배에서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자신이 맺은 열매를 확인하고 큰 위로를 얻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 속에 전국을 순회하며, 선교 초기처럼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해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했다. 다리 골절로 무릎이 성치 않았으나 하루 20킬로미터를 걸으며 전국을 누볐다고 전해진다.
오랫동안 염원한 연희전문학교가 1915년 문을 연 뒤에도 그는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1916년 초, 개정사립학교규칙이 요구한 일본어 자격을 갖추려 일본으로 건너가 무리하게 어학과 면담과 연설을 이어가다 건강이 더 나빠졌다. 결국 그는 31년 전 제물포에 내렸던 날과 거의 같은 무렵,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집에서 그는 남대문 집 사진을 늘 머리맡에 두고 오래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숨쉬기조차 버거운 그에게 릴리어스가 “어디로 가고 싶으냐, 한국이냐”고 묻자, 그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전해진다. 다시 한국으로 가는 여행을 꿈꾸던 언더우드는 그 이튿날, 1916년 10월 12일 쉰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가상 인터뷰
※ 학생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 Q. 선교사님이 어떤 분인지 소개해 주시겠어요?
- 안녕하세요, 저는 영국 런던에서 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입니다. 헌신적인 신앙을 지닌 집안에서 자라며 자연스레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어려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품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그 꿈을 향해 공부에 매진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르심을 받아 조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885년 부활절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조선 곳곳에서 여러 사역을 했습니다.
- Q. 조선으로 오시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 제가 해외 선교의 꿈을 품은 것은 네 살 때, 인도 선교사님의 강연을 들으면서였습니다. 오래도록 저는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조선의 안타까운 소식도 들었지만 크게 마음이 가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어느 조선인이 보내온 호소문을 읽으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는 가겠지’ 하며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는 물음이 마음에 울렸고, 그 즉시 조선 선교를 자원했습니다.
- Q. 은자의 나라로 향하며 두려움도 크셨을 텐데, 도착하던 날의 심정은 어떠셨나요?
- 제물포항은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그 안개 뒤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습니다. 조선은 소식을 들으려 해도 일본이나 중국을 거쳐야 하는 숨겨진 나라였고, 들려오는 소식도 밝지 않았습니다. 문을 굳게 닫은 그 땅에서 무엇이 어떻게 될지, 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 Q. 그럼에도 무엇이 마음을 붙들어 주었습니까?
- 의사 알렌 선생을 도와 병원 일을 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말로만 듣고 상상만 하던 이들을 직접 만나니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지요. 병원에서 일하며 저는 교육 사역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지금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Q.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그토록 마음을 쏟으신 까닭은 무엇인가요?
- 사람의 손에 들린 성경책 한 권이 가장 훌륭한 설교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말로 전도하는 것이 금지된 땅에서, 저는 말씀을 조선의 말과 글로 옮기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선어를 배우고, 문법서를 쓰고, 사전을 엮고, 번역위원회의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글이 남으면 사람이 떠난 뒤에도 복음이 남으니까요.
- Q. 고아원을 세우신 일은 어떤 마음에서였습니까?
- 전도가 막힌 상황에서, 저는 조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갈 곳 없는 아이들을 품기로 했지요. 걱정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저는 그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돌보았습니다. 그 작은 시작이 훗날 학교로 자라났으니, 저에게는 단순한 방편이 아니라 사랑의 자리였습니다.
- Q. 서른 해 동안 변해가는 조선을 보시며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 복음이 조금씩 퍼지고 사람들이 눈을 떠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희 선교사들만의 힘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함께 이루어간 변화였습니다. 여행을 한 번 나서면 백 명이 넘는 이들을 만나 세례를 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 땅에 심긴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 Q. 교파를 넘어선 ‘하나의 교회’를 그토록 바라신 이유는요?
- 저는 대한장로교회나 대한감리교회가 아니라, 그저 ‘대한 그리스도 교회’ 하나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양 교단의 분열까지 그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지요. 제 아내는 저를 두고 제 존재의 모든 흐름이 연합을 향한다고 했는데, 부끄럽지만 맞는 말입니다.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지만, 다음 세대가 이어주기를 바랍니다.
- Q. 왜 조선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습니까?
- 형님은 이제 그만 미국에 돌아와 편히 지내자고 여러 번 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제안을 단 한순간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저에게 십자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생명이요 기쁨이었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땅끝까지 이르러 말씀을 전하라는 그 일이, 제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 Q. 생의 마지막,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셨나요?
- 미국의 집에서 저는 남대문 집 사진을 늘 머리맡에 두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숨쉬기조차 힘든 때에도 마음은 자꾸 한국으로 향했지요. 아내가 어디로 가고 싶으냐, 한국이냐 물었을 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땅이 제 마음의 고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드리미학교 신규담)
- 『개척자 언더우드』 (인물 전기, 학생 정리 노트)
- 『한국 교회사』 정리 노트 (인천·갑신정변·제중원·언더우드 장)
- 언더우드 일대기·연표 (학생 정리)
- 언더우드가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 (1910)
- 학생 재구성 가상 인터뷰 (창작)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