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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연구 · 학생 탐구

물 근원을 고쳐라 — 유진 벨, 호남을 품다

켄터키의 농부 아들이 목포와 광주에 복음의 첫 길을 낸 30년. 학생의 심층 연구 마흔 장을 이어, 사실을 다시 짚어 옮긴 이야기.

✍️ 드리미학교 ‘Missionaries from Aunae’ · 윤드림 심층 연구

1898년 무렵 목포 포구와 언덕을 그린 수채 일러스트AI 일러스트
1898년 무렵의 목포 — 개항장 위 언덕에 첫 예배가 서던 자리.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유진 벨 초상

유진 벨

Eugene Bell

전라남도 교회의 개척자 · ‘배유지’

본명
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생몰
1868–1925 (미국 켄터키 출생)
입국
1895년 (남장로회 10·11번째로 로티와 함께)
거점
목포(1898) · 광주(1904)
사역
교회 개척 · 교육 · 의료 지원
잠든 곳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

👨‍👩‍👧 첫 아내 로티(1901년 별세·양화진), 둘째 아내 마가렛(1919년 열차 추돌로 별세), 셋째 아내 줄리아. 딸 샬롯(한국명 인사례)은 린튼(인돈)과 결혼해 3대에 걸친 호남 선교 가문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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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키의 시골, 말을 기르던 농장의 아들이 있었다. 훗날 ‘배유지’라 불린 이 사람은, 조선 남쪽 끝 목포와 광주에 복음의 첫 길을 냈다.

아래는 드리미학교 학생 윤드림의 심층 연구를 이어, 마흔 장에 담긴 그의 삶을 사실대로 다시 짚어 옮긴 이야기다.

켄터키의 말농장, 한 소년의 출발

1870년대 켄터키의 말 농장을 그린 수채 일러스트AI 일러스트
말을 기르던 켄터키의 농장 — 유진 벨이 나고 자란 곳.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미국 켄터키주 셀비카운티의 스코츠네이션에서 1868년 4월 11일, 유진 벨이 태어났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켄터키는 말 경주가 유행하던 땅이었고, 그의 집안은 종마를 기르는 농장을 일구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이 말 사업장은 훗날 그가 먼 조선의 호남 땅에서 선교에 재정을 아낌없이 쓸 수 있게 한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농부의 아들로 자란 그는 흙과 계절을 아는 사람이었다. 훗날 조선에 건너와서도 그는 상추와 무를 비롯한 여러 채소와 과일을 손수 심고 가꾸었다. 말과 밭, 그리고 노동에 익숙했던 이 유년의 감각은 낯선 땅에서의 오랜 시간을 견디게 한 조용한 힘이었을 것이다.

남장로교의 학교들, 호남으로 향한 준비

남북전쟁은 미국 교회마저 갈라놓았다. 장로교 역시 남과 북으로 나뉘었고, 남장로교단이 세운 학교 가운데 가장 엄격했던 곳은 햄든시드니 대학이었다. 이 학교 출신 레이놀즈 선교사는 여러 언어에 능해 훗날 한국에서 성경 번역에 크게 힘썼다.

유진 벨은 1889년 스물한 살에 켄터키의 센트럴대학에 입학했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에 학비를 줄이려 애쓴 끝에, 2년 만인 1891년에 조기 졸업했다. 이후 햄든시드니에 있던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이 학교는 호남 지역에만 오십 명이 넘는 청년을 선교사로 보낸 곳이었다. 호남에서 백 년이 넘은 교회들은 대부분 이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라 전해진다.

그는 1893년 켄터키에 정식 신학교가 생기자 그리로 전학했고, 이듬해인 1894년에 졸업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직 그의 앞에 뚜렷이 놓이기 전, 그러나 이미 그를 그리로 이끌 학맥과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스승의 딸, 로티 위더스푼

유진 벨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은 루이빌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였다. 그가 사랑하던 제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진 벨이었고, 그 스승의 딸이 로티였다. 로티의 집안 위더스푼 가문은 미국 건국에 이름을 남긴 명문가로, 1776년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쉰여섯 명 중 유일한 목사를 배출한 가문이라 전해진다.

1894년 6월 26일, 스물여섯 살의 유진 벨은 한 살 연상인 스물일곱의 로티와 결혼했다. 학부 시절부터 스승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그 스승의 사위가 된 셈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결혼에 앞서 1893년 11월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상태였다. 임명이 먼저였고 결혼이 뒤였으며, 그 이듬해 태평양을 건너는 길이 이어졌다.

조선으로 가는 길, 칠십 일의 항해

1895년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나룻배를 그린 수채 일러스트AI 일러스트
1895년 4월, 한강을 거슬러 마포로 — 미국을 떠난 지 칠십 일.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895년 2월 1일, 부부는 선교의 먼 길에 올랐다. 3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닿기까지 오랜 뱃멀미와 고통을 견뎌야 했다. 배편이 자꾸 미뤄져 한 달을 더 기다린 끝에, 4월 3일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4월 4일 부산에 이르렀고, 다시 배를 갈아타 6일 오후 제물포에 도착했다.

8일 아침에는 한강을 거슬러 올랐다. 밤에는 배 안에서 잠을 자고, 9일 새벽 다시 노를 저어 일곱 시 무렵 마포 나루에 닿았다. 미국을 떠난 지 꼭 칠십 일 만인 1895년 4월 9일, 유진 벨과 로티는 마침내 서울에 들어섰다.

먼저 온 선배들, 열번째와 열한번째

유진 벨과 로티는 남장로교 조선선교부의 각각 열번째, 열한번째 선교사로 입국했다. 이들보다 앞서 온 선배들은 이미 내한 사년차에 접어들어 전주와 군산에서 본격적으로 선교를 펼치고 있었다. 그중 드루 선교사는 군산 선교부를 없애자는 의견에 반대해 전킨 목사와 함께 군산 선교를 이어갔으나, 병이 깊어져 1901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 끝내 조선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선배들이 미처 다하지 못한 몫이 전라남도였다. 그들은 이 남쪽 땅을 뒤에 오는 후배에게 넘기려 했고, 마침내 유진 벨이 서울에 이르자 남장로교 조선선교부는 그를 통해 전라남도 선교의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땅이 그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다.

‘조선어’라는 괴물과의 씨름

조선에 도착한 선교사가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할 일은 언어였다. 유진 벨에게 가장 힘겨웠던 것도 바로 조선어였다. 어순이 영어와 판이하고 존대법이 복잡한 이 언어를 두고, 그는 마치 머리 여럿 달린 괴물 히드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1895년 봄에 도착해 1898년 봄 목포에 부임하기까지 약 삼 년 동안 어학 선생을 개인적으로 고용해 부지런히 언어를 익혔다.

언어만큼이나 그를 괴롭힌 것은 이와 빈대, 벼룩과 함께 지내는 일이었다. 그는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여러 곳에서 나며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선교사들은 이따금 산속 절간에서 휴식하기도 했는데, 유진 벨 또한 두 달가량 그렇게 쉬었다고 전해진다.

1895년, 콜레라와 을미사변의 밤

1895년 겨울 궁궐 불침번을 그린 수채 일러스트AI 일러스트
을미사변 뒤, 석 달 동안 밤마다 이어진 궁궐 불침번(1895–96).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도착한 그해, 조선에는 콜레라가 크게 번졌다. 조선 정부는 방역위원회를 세우고 그 운영을 서양 선교사들에게 맡겼으며, 에비슨 의사가 회장이 되었다. 그가 도움을 청하자 드루 선교사와 전킨 목사, 그리고 신참 유진 벨도 힘을 보탰다. 콜레라 병원까지 세우며 애쓴 끝에, 병은 두 달쯤 지난 8월 무렵 가라앉았다.

그해 가을, 그는 전라도 답사에 나섰다가 뜻밖의 설사병에 걸려 계획을 접어야 했다. 그가 군산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에 닿기 이틀 전, 서울에서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고종은 국내의 미국 선교사들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언더우드가 이를 맡아 후배 선교사들을 불러 모았고, 헐버트와 에비슨, 유진 벨 등이 나섰다. 1895년 10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석 달 동안, 이들은 매일 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권총을 차고 궁궐의 불침번을 섰다.

첫 사랑 목포, 그리고 거듭된 좌절

첫 답사가 설사병으로 무산된 뒤, 유진 벨은 선배 레이놀즈와 함께 두 번째로 목포로 향했다. 이번에는 폭풍우를 만나 사흘을 섬에 머물며, 태평양을 건너올 때보다 더한 멀미를 견뎌야 했다. 그 와중에도 레이놀즈는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땅을 사들였다고 전해진다. 목포는 바다와 섬뿐이던 곳이었으나, 그들은 장차 사택과 교회, 학교, 병원이 들어설 넓은 부지를 마련했다.

그사이 유진 벨은 서울에서 두 교회를 틈틈이 도왔다. 목사가 없을 때는 미리 준비한 영어 설교를 선배들에게 지도받아 서툰 조선어로 대신 설교하기도 했다. 조선에 온 지 겨우 일 년 만의 일이었다.

목포를 다녀온 뒤 그는 어학 선생을 바꾸어 변창연을 조사로 맞았다. 변창연은 그의 신실한 헬퍼로서 조선어 학습은 물론 전라남도 선교의 시작을 곁에서 도운 인물이었다. 1896년 5월에는 첫 아들이 태어났다. 유진 벨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의 가운데를 따 아이에게 ‘헨리 베나블 벨’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나주의 세 번의 실패

전라도가 남북으로 나뉘던 무렵, 남장로교선교회는 남쪽에 선교부를 세우는 일이 절실해졌다. 좌수영은 배로 들어가기가 너무 어려웠고 목포는 개항 결정이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선교부는 인구가 많은 큰 고을 나주를 택해 그 책임을 유진 벨에게 맡겼다.

1897년, 그는 조사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향했다. 3월에 처음 나섰을 때는 배를 놓쳤고, 다시 내려가서는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외국인이 함께 사는 데서 올 나쁜 영향을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복음을 전하려 할수록 반감만 커졌다. 5월에 절친한 해리슨과 함께 다시 갔으나 집을 지으려던 뜻은 꺾였고, 그는 다시 서울로 물러났다.

1895년 첫 출장에서는 설사와 복통, 1896년 목포 길에서는 멀미와 폭풍우, 그리고 1897년 나주에서는 배를 놓치고 반발에 부딪혔다. 그해 세 차례나 나주를 찾았으나 좀처럼 성과가 보이지 않았다. 유진 벨은 지쳐 실망 속에 서울로 돌아갔고, 변창연 조사만이 남아 그곳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이어갔다.

길은 뜻밖의 방향에서 열렸다 — 목포 개항

거듭된 실패로 나주에 대한 의욕이 사그라들 무렵, 유진 벨의 마음속에서는 자꾸 목포가 떠올랐다. 개항만 빨리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짙었다. 일본 제국은 조선을 삼키려 개항을 요구했으나, 선교사들은 그 문이 도리어 생명과 소망의 통로가 되기를 바랐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과 인천, 원산이 열린 뒤, 마침내 그 이십일 년 뒤인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개항되었다. 나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던 유진 벨은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그해 가을 군산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전남 지역 선교 부지는 마침내 나주에서 목포로 바뀌었다. 11월 27일 목포에 도착한 그는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목포 교회를 열다

목포 양동교회 초기 모습(기록 사진)기록 사진
목포 양동교회의 초기 모습. · 기록 사진(학생 탐구 자료)

1898년 5월 15일, 유진 벨은 목포에서 사람들과 함께 첫 공식 예배를 드렸다. 목포 교회의 시작이자, 넓게는 전라남도 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는 임시 거처를 얻어 사람들이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고쳤고, 나주에서 겪은 반감과 저항은 이곳 목포에서는 거의 없었다.

교회를 세운 지 두 달도 안 되어 주일 저녁 예배가 더해졌고, 이 년 반쯤 지난 무렵에는 수요기도회와 두 개의 세례 준비 교육반이 운영되고 있었다. 유진 벨은 훗날 1928년 발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편찬에도 직접 참여했는데, 이는 그의 기록에 한층 무게를 더해 준다.

혼자 목포에서 사역하던 유진 벨은 외로움과 불편함을 견디다 못해, 그해 9월 초 아내 로티와 두 살 난 아들 헨리를 목포로 데려왔다. 오래 떨어져 지내던 가족이 곁에 오자 그는 큰 힘을 얻었다.

그토록 기다린 사람, 오웬

1898년 11월 6일, 마침내 의사 오웬 선교사가 목포에 도착했다. 유진 벨에게 그는 천군만마 같았다. 그해 12월 중순에는 봄부터 지어 온 정식 사택도 완성되었는데, 유진 벨은 이 집을 ‘베리하우스’라 이름 붙였다. 목포와 전남의 첫 교회, 의사 동역자 오웬의 합류, 그리고 좋은 주거지까지 — 1898년은 그의 인생에서 각별한 해였다.

이듬해 1899년에는 둘째이자 첫딸 샬롯이 태어났다. 목포에서 태어난 첫 외국인 아이로, 부모뿐 아니라 목포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자랐다. 같은 해 오웬은 진료소를 열었는데, 이는 목포는 물론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다. 환자가 늘 많아 나무로 만든 순서표를 받아 기다려야 했는데, 그 순서표에는 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1899년에는 여성 사역자 스트래퍼도 도착했다. 남녀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 남성인 유진 벨과 오웬이 다가가기 어려웠던 여자아이들에게 그녀의 도착은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유진 벨은 남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스트래퍼는 여학교를 시작했으니, 이 씨앗이 훗날의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로 이어졌다.

목포의 첫 열매와 교회의 기둥들

목포교회는 1900년 8월 26일에 첫 세례식을 치렀다. 그에 앞서 유진 벨과 오웬은 유진 벨이 당회장, 오웬이 서기를 맡아 당회를 열었다. 세례 문답에 서른 명이 응답해 여섯 명이 세례를, 여덟 명이 학습을 통과했다. 교회를 세운 지 이 년 만에 첫 세례자를 낸 목포교회는 교인이 오십에서 일흔다섯을 넘나들 만큼 자라났다.

이 무렵 목포교회의 기둥이 된 인물이 김윤수였다. 그의 어머니가 종기로 진료소를 찾았다가 오웬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머니가 다시 아들 김윤수를 전도했다. 그는 술장사로 큰돈을 모은 사람이라 세례를 두고 논의가 오갔으나, 마침내 술장사를 포기함으로써 세례를 받았다. 회심한 그는 유진 벨의 두 번째 조사가 되어, 유진 벨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 자리를 메웠고, 훗날 로티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편 벨 부부는 미혼의 오웬을 장가보내기로 마음먹고, 일본에서 함께 배를 탔던 북장로교 소속 휘팅을 떠올렸다. 1900년 여름 두 사람을 군산으로 불러 함께 지내게 하자 사랑이 싹텄고, 그해 12월 12일 언더우드의 집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선교사 사이의 조선 최초의 결혼이었다.

한 알의 밀알 — 로티의 죽음

1901년 봄, 유진 벨은 서기로서 전주와 군산 선교부를 방문하기 위해 오웬과 함께 길을 나섰다. 자녀들과 아내를 안아 주고 집을 나선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티가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위급하다는 소식에 유진 벨은 군산으로 달려갔으나, 그곳에서 들은 것은 이미 아내가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로티의 죽음은 남장로교 조선선교회가 내한한 이래 처음 맞은 희생이었다. 유진 벨은 동료들의 도움으로 아내를 안고 서울로 옮겨, 언더우드의 집례로 장례를 치르고 양화진에 뉘었다. 로티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01년 4월의 일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다섯 살 헨리와 두 살 샬롯을 데리고, 유진 벨은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잠시 귀국하려던 계획은 이렇게 슬픈 걸음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가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를 때, 목포의 모든 성도가 함께 슬퍼하며 기도해 주었다.

돌아온 그 사람 — 목포의 재기

유진 벨이 떠난 뒤, 오웬 부부마저 건강 문제로 고국으로 떠났고 목포교회에는 사역자가 거의 남지 않았다. 아펜젤러의 비극적인 죽음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1902년,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 회의를 위해 배로 이동하던 중 선박 충돌 사고를 당했는데, 자기 조사와 여학생을 구하려다 물에 잠겼다고 전해진다.

목자 없는 어린 양이 되어 가던 목포교회를 두고, 유진 벨은 미국에서 피폐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1902년 12월 홀로 다시 목포에 돌아왔다. 자녀들을 미국에 두고 먼 태평양을 홀로 건넌 걸음이었다.

당시 목포교회 교인 대부분은 한 달에 오 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런 이들이 자기 재산을 내어 교회당 건축에 힘쓰는 것을 보며, 유진 벨은 그 헌신이 참으로 놀라운 자기부정의 삶이라고 기록했다.

광주로 — 비로소 빛이 열리다

1904년 겨울 광주 양림 언덕의 선교 마을을 그린 수채 일러스트AI 일러스트
1904년 성탄절 아침, 광주에 열린 첫 예배.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1903년, 유진 벨은 목포에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역에 나섰다. 초등 과정에서는 성경과 국문, 산학을, 뒤에 신설된 중학 과정에서는 성경과 역사, 과학을 가르쳤다. 학생들에게는 주일 교회 출석과 주일 오후의 거리 전도가 의무였다. 두 학교는 훗날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문을 열었다.

목포에서의 재기가 펼쳐지면서, 유진 벨은 삼 년의 홀아비 생활을 마감했다. 두 번째 아내는 마가렛 불이었다. 군산에서 사역하던 남동생 윌리엄 불을 격려하러 조선에 와 있던 그녀는, 뜻밖에 홀아비 유진 벨과 교제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 부부와 오웬 부부 네 사람은 광주로 출발해 이튿날 도착했다. 그리고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열한 시, 광주에서 첫 예배가 드려졌다.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려고 흰옷을 입고 모여들었고, 유진 벨은 큰 목소리로 복음을 전했다. 도착한 지 닷새 만의 첫 예배였다.

광주 제중원과 근대 교육

광주에 힘을 집중하기 위해 놀란과 프레스톤이 광주로 옮겨 왔다. 놀란이 의료 사역을 맡았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1906년 스트래퍼마저 안식년 뒤 돌아오지 않아 어려움이 겹쳤다. 그러나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 열세 명의 선교사가 호남으로 새로 왔다. 여러 선교사의 헌신으로 운영된 광주 제중원은 1970년 남장로교에서 재단이 분리되며 ‘광주기독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광주의 교회에 성도가 늘어가던 무렵, 아이들은 주중에도 교회에 와 놀다 가곤 했다. 마땅한 놀거리가 없던 시절, 교회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유진 벨은 이 아이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하려 1908년 광주에 기독교 남녀 학교를 세웠다. 남학교는 그가 맡아 한 명으로 시작했으나 이내 스무 명이 등록했고, 뒤에는 여든다섯 명이 평균 출석할 만큼 자라났다.

죽도록 충성하였다 — 오웬의 죽음

1909년 4월 3일, 오웬 선교사가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흔둘의 이른 죽음이었다. 그는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였으나, 죽어 가는 전라도 사람들의 생명을 향한 안타까움이 그를 늘 집 밖으로 내몰았다. 딸이 “왜 아빠는 집에서 지내지 않으세요?” 하고 물을 정도였다.

오웬이 떠난 뒤 선교 지역을 순회할 때마다 유진 벨은 놀라곤 했다. 가는 곳마다 오웬이 남긴 믿음의 공동체들이 유난히 빠르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웬은 살아생전 그것을 제가 키운 것이라 자랑한 적이 없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일했을 뿐이었다. 그의 죽음은 로티의 죽음 다음으로 유진 벨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노회와 총회, 그리고 평양의 강단

유진 벨의 중년기는 몹시 바빴다. 후배를 이끌고, 광주의 교회를 담임하며 서북부 지역을 순회 전도하고, 광주와 목포의 병원과 학교를 살피는 한편, 멀리 평양신학교까지 강의하러 다녔다. 1921년 6월, 남장로교 선교의회는 마침내 그를 평양신학교 전임교수로 파송하기로 결정했고, 그는 평양숭실전문학교 이사직도 함께 맡았다.

교회의 조직을 세우는 일에서도 그의 자리는 컸다. 1907년 9월 17일, 일흔여덟 명의 선교사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를 조직했는데, 이때 유진 벨이 사회를 맡았다. 이후 노회가 총회로 승격되고 선교사들이 총회장을 돌아가며 맡기로 하면서, 1914년 남장로교 차례가 되어 유진 벨이 그 회기의 총회장을 이었다.

한편 그는 선교사들이 늘 강조하던 자전·자치·자립의 정신에 따라, 한국인 목사가 담임을 맡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1916년 8월 당회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그를 대신해 이기풍 목사가 부임했다.

다시 아내를 잃다 — 1919년의 열차 사고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교인 다수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던 이 와중에, 유진 벨 일행이 겪은 사고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해 3월, 유진 벨은 아내 마가렛, 동료 녹스·크레인 목사와 함께 서울로 출장을 갔다. 일을 마친 뒤 일행은 제물포에서 미국에 주문해 도착한 승용차를 인수했고, 그 차를 타고 광주로 돌아가던 중 열차와 추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아내 마가렛과 동료 크레인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녹스는 실명했고, 운전하던 유진 벨도 부상을 입었다. 오늘날 마가렛과 크레인의 묘는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있는데, 오웬의 묘 옆에 크레인이, 그 뒤에 마가렛이, 그 곁에 훗날 유진 벨이 나란히 누웠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그는 사퇴 의사를 밝히고, 두 아들과 함께 1919년 7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세 번째 결혼과 대를 이은 선교

두 번이나 아내를 잃고 오십 대에 접어든 유진 벨은 이제 은퇴를 생각하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여러 곳을 다니며 그간의 사랑에 감사를 전하고 한국을 알렸으며, 후배들에게 조선 선교를 권했다. 그리고 자신도 세 번째 아내를 맞았다. 1921년 9월 버지니아에서 줄리아와 결혼했는데, 평생 독신으로 지낼 줄 알았던 줄리아 역시 군산에서 오래 사역해 온 조선 선교사였다. 두 사람은 1922년 3월 광주로 돌아왔다.

유진 벨이 광주에 도착하고 며칠 뒤, 미국에서는 그의 외동딸 샬롯이 남장로교 선교사로 지명되었다. 어머니 로티를 두 살에 여의고 미국 조부모의 손에 자란 샬롯은, 부모의 뒤를 이어 스스로 한국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녀는 곧 조선으로 향해 일본 고베에서 린튼 선교사와 결혼하고 군산에 부임했다. 우리말 이름 ‘인사례’로 불린 샬롯과 린튼(인돈)의 후손은 삼 대에 걸쳐 한국 선교에 헌신했으니, 유진 벨이 심은 씨앗은 그의 딸과 사위, 그 자손에게로 이어졌다.

삼 년 만에 돌아온 광주의 교회는 놀랍도록 자라 있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도 광주와 전남의 교회가 스스로 서서 발전하는 것을 보며, 유진 벨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이제 앞서기보다 후배들의 뒤에서 기도하며 협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부활의 소망이 되어 — 물 근원을 고쳐라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을 그린 수채 일러스트AI 일러스트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 — 유진 벨과 동역자들이 나란히 잠든 곳. · AI 생성 일러스트(회화체 재구성)

유진 벨은 1925년 9월 28일 광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쉰일곱이었다. 1895년 조선에 와 만 삼십 년을 사역한 그는, 우리말 이름 배유지로 불린 전라남도 교회의 개척자이자 지도자였다. 서른에 목포 선교부를, 서른여섯에 광주 선교부를 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이 년 전에 이미 유서를 남겼고, 그즈음부터 건강이 나빠져 아내 줄리아의 돌봄 속에서 교회와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천국의 부르심을 기다렸다. 그의 몸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줄리아는 남편을 묻은 뒤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평생 독신을 각오하고 조선에 온 그녀는 여러 사역을 이어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벌이며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하던 때에야 비로소 광주를 떠나 1940년 귀국했다.

여리고 성의 문제는 물 근원을 고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비틀거리는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은 늘 근원으로 돌아가 그 물의 원천을 고치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그의 이야기는 말한다. 유진 벨과 오웬을 비롯한 십수 명의 헌신자가 나란히 누운 그 선교 묘역 앞에서, 우리 또한 그들처럼 순전하고 충성스러운 신자로 새롭게 고침받기를 바랄 뿐이다.

가상 인터뷰

학생이 유진 벨의 선교 편지와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인터뷰입니다. 실제 발언 기록이 아닙니다.

Q. 선교사님, 먼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입니다. 1895년 조선에 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목포와 광주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자 힘썼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Q. 그렇게 먼 조선까지 오게 되셨습니다. 무엇이 선교사님을 움직였습니까?
조선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많은 땅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부르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마음은 선교하는 내내 저를 붙들어 준 힘이었습니다.
Q. 도착하신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처음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조선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었고 백성들의 삶도 결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의 진지함과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았고, 그 모습을 보며 이 땅에 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Q. 조선의 어떤 미래를 기대하셨습니까?
성경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려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조선 교회의 미래를 기대하게 되었지요. 저는 언젠가 조선의 교회가 스스로 서서 이 땅을 섬기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Q. 희망을 품고 사역하셨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호남 지역을 다니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길은 험했고 교통도 불편했으며, 때로는 질병과 외로움 속에서 사역해야 했습니다. 사실 여러 번 실패가 거듭될 때는 많이 원망하기도 하고, 이곳이 제 자리가 맞느냐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다시 힘을 얻곤 했습니다.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십니까?
모든 사역이 소중하지만, 목포에서 교회를 처음 세웠던 일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첫 정탐에서는 설사병으로, 두 번째 목포 길에서는 폭풍우로, 나주에서는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번번이 서울로 돌아가야 했지요. 그 교회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복음이 뿌리내리는 시작점이었습니다.
Q. 아내를 두 번이나 떠나보내시고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아내를 떠나보낸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었습니다. 한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요. 그런데도 미국에 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네 선교지로 가라고, 거기가 네 자리 아니냐고, 한 번 맹세한 일 끝까지 하라고. 그래서 저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Q. 선교사님을 끝까지 움직이게 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를 움직인 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에 새로운 소망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Q.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말씀을 전하신다면요?
교회는 건물보다 사람을 세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맡겨진 자리에서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Q.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심은 것은 작은 씨앗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씨앗을 자라게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한국 교회가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자료 · 출처

  • 학생 심화 연구 『물 근원을 고쳐라 · 유진 벨 선교사』 (Ch.1~40) — 본문 서사의 주 자료 (드리미학교 윤드림)
  • 유진 벨(배유지)의 선교 편지 — 학생 연구에서 인용·재구성한 1차 자료
  •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1928) — 유진 벨 편찬 참여
  • 「유진 벨 선교사 가상 인터뷰(사이트 버전)」 — 편지·사료를 바탕으로 학생이 재구성한 가상 대담
  • 남장로회 조선선교부 기록 및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 자료 · 유진 벨(배유지) 한국어 위키백과

사실 골격은 학생 심층 연구를 통설·사료와 대조해 정정했습니다(입국 1895년, 목포 첫 예배 1898년, 광주 개척 1904년 등). 삽화는 회화체 AI 일러스트로 실제 사진과 구분해 표기했습니다.